내맘내시 오작가 추천 명시

보고 싶은 날에 읽어 보는 시집, 내맘내시

by 지크피디 ByJIKPD

오작가가 추천하는 내맘내시


1. 기록 / 송찬호


대체 서기(書記)된 자로서의 책무란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언젠가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코끼리떼를 흰 종이 위로 건너오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숫자, 나이와 성별, 엄니의 길이와 무게, 무리의 지도자 습성, 이동 경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고 주름진 코로 노획한 물건들 ― 옷핀, 인형, 가발, 빈 콜라병, 탐정용 도보기, 야구 사인볼, 샌들 한 짝, 담배 파이프, 테러리스트의 복면 등, 온갖 문명의 잔해들도 자세히 적었다

그들의 다리는 굵고 튼튼하다 포도주를 짓이겨 대지의 부은 발등에 붓고 거친 나뭇가지와 뿌리를 씹어 엽록의 공장을 돌리고 낫처럼 휘어진 거대한 비뇨기로 곡식을 베어 눕힌다

그들에게 실향이란 없다 황혼이 오면 그들은 목울대를 움직여 그들이 사랑하는 악기, 튜바의 삼각주로, 전 세계로 흩어진 천 개의 코끼리강을 부른다 달콤한 무릎 관절의 샘이 흰개미를 불러모으듯, 다이아몬드 광신이 총잡이를 부르듯,

홍해가 갈라지는 아침, 찢겨진 범선 같은 귀를 펄럭이며 한 무리의 대륙이 새로운 길을 찾아 천천히 이동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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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냄새 / 송찬호


또 몇 마리의 돼지를 잡아 넘겼다

옷에서 식기에서 손에서 돼지 피 냄새가 났다

칼을 놓고 사람들은 며칠 동안 밥맛을 잃었다


이상하다 죽은 고기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밥에 얼굴을 처박고 부비면 아직도 따스하고

뭉클한 식욕의 덩어리, 식욕의 고삐 없는

냄새의 끈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여기저기

냄새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냄새를

따라 제 짝을 찾아가고 새끼를 낳고 냄새를

맡으며 집에 되돌아온다


그런, 죄악의 덩어리 가난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 지독한 가난에 냄새가 마비된 지

오래, 쑤시고 찔러도 칼끝은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참으로 가난은 질기고 두꺼워 냄새에

무뎌진 칼로는 죽은 고기조차 썰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무리 가난을 속이려 해도 온 식구가

좁은 방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지 않아도

다 안다 소리 없이 잠든 식욕을 흔들어 깨우며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눈을

감아도 다 안다


둥근 원을 그려 놓고 냄새의 끈을 길게 매달아

한끝을 손에 쥐고 낙서하다 잠든 아이들의

점점 작아지는 글씨를 들여다보면

(아빠, 일찍 들어오세요)


아직도 그 자리의 올가미에 걸려 버둥대는 고깃덩어리여!

한 근의 가난이여!



3.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4.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 심보선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을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 뒤에는 무한의 더 뒤가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있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을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 바다 / 서정주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아― 반딪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우름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낫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게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우에 풀닢처럼 흣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젖은 국토가 있다.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푸리카로 가라!



6. 그리고 계속되는 밤 / 황병승


알코홀릭alcoholic, 그것은 연약한 한 존재가 자신을 열정적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빠질 때까지, 더 나빠질 때까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과도 같이, 지구 바깥에, 허공에 집을 짓는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나도 너처럼 말수가 적었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들엔 얼굴을 붉혔다

험한 말들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 대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땐

꿈꾸는 약을 샀지, 매일 밤 계속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꿈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군

아름답다는 건 때로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찬물로 세수를 해라 이 엄마가 죽도록 때려줄 테다

공허해질 때까지 더없이 공허해질 때까지


언젠가는 밤새도록 책이란 것도 읽었지

너처럼 책 속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짐승처럼

종이 속에 묻혀 조금은 울기도 했지

그래 손등은 보드라웠고 뺨은 희었다

아! 뺨이 참 희었는데……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저 언제나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내가 나의 부모였으니까


웨이트리스waitress,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먹다 남긴 음식을 치워주겠다는 뜻이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7.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 황병승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었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가 알기는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8. 유식한 천문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When I Heard Learn'd Astronomer)

/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유식한 천문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증명이니 수치니 하는 것이 내 앞에 줄지어 펼쳐졌을 때,

그것을 더하고, 나누고, 측정할 도표와 도식이 제시되었을 때,

그가 강의실에서 갈채리에 하는 강의를 들으며 앉아 있었을 때,

그토록 일찍이 영문 모르게 나는 지쳐서 진저리치며

결국은 일어서서 미끄러지듯 흘러 걸어 나왔지

밤공기는 알 수 없이 젖어 있었는데, 이따금

나는 완벽한 침묵 속에 위로 별을 쳐다보았지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diagrams, to add, divide, and measure them,

When I sitting heard the astronomer where he lectured with much applause in the lecture-room,

How soon unaccountable I became tired and sick,

Till rising and gliding out I wander'd off by myself,

In the mystical moist night-air, and from time to time,

Look'd up in perfect silence at the stars.



9. 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는 대지는 넓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는 주변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10. 반성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시를 두고 누군가는 낯설어야 한다 하였고 누군가는 온 몸으로 온 몸을 밀고가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였다. 또 혹자는 은유가 살아 있는, 응축되고 암호화된 시가 시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독자 친화적인 쉬운 시가 진정 시라고 말한다. 이 중에서 정답을 찾으라고 하면 나는 거절하겠다. 모두 정답이기도 하고 모두 정답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게를 두자면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쪽에 더 가깝다. ‘A는 B다’라고 정의할 때 ‘는’이라는 조사는 B의 예외항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배타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시를 정의 내리자면 어려운 시‘도’ 시이고 쉬운 시‘도’ 시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 모인 열편 시 중에는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다. 하지만 시를 두고 ‘해석’하지 않는 나는 시의 난이도가 시를 판단하는 미학적 기준이 아니다. 나는 그저 시를 느낀다. 그래서 해박한 시론을 품을 사람에 비해 시를 음미하는 맛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좀 아쉽긴 하다. 그래도 시를 순전히 즐길 줄 아는 점이 감사하고 즐겁다는 생각이다.


내가 시를 즐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바로 음악성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근본적으로 음악가라고 여기고 있다. 고대에는 시인이 음유시인으로 활동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엄선된 열편의 시들은 모두 내가 느끼기에 음악성이 뛰어난 시들이다. (원문을 충분히 음미할 수 없는 휘트먼의 시는 예외다.) 그 중에서도 송찬호의 <기록>과 서정주의 <바다>는 단연 일품이다.


다음으로는 공감각, 회화성, 은유, 환유… 같은 것들이 와 닿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려 “다음은 내 차례야!”하고 감동을 주러 오는 것은 아니고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불시에 탁, 하고 타격을 준다. 가령, “점점 작아지는 글씨를 들여다보면”(냄새),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슬픔이 없는 십오 초), “점프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그리고 계속되는 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같은 시구들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렇게 습격을 당하고 나면 얼마간 책을 덮고 그들의 재능에 그만 할 말을 잃고 어리둥절해진다.


그렇다. 좋은 시를 두고 너무 많은 말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구태여 정의 내리자면 그렇게 쓴 추천사도 좋은 추천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작가
















#지켄트북스 #작가그룹 #열인백선

보고 싶은 날에 읽어 보는 시집, 내맘내시

내 맘으로 선정하는 내 시

내 맘대로 추천하는 내 시

내 맘을 담아 전달하는 내 시

내 맘을 표출하는 내 시


영화와 노래는 우리가 다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문화입니다

지켄트와 작가들이 추천하는 시들로 또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라며 기획해서 작가들과 함께 만듭니다

지크피디 드림 ( ByJIKPD )


서울인문포럼 2015년1월14일 신라호텔서 개최

배양숙대표 개회사 추천시 : 다시 – 박노해

문전희시인 강연회 추천시 : 꽃밭의 독배 –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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