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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Nov 29. 2021

헨리 퍼셀, ⟨Music for a While⟩

음악은 잠깐동안... 음악의 위안, 혹은 기만에 대하여

https://youtu.be/a4nSurzfGuQ


1

Music for a while

음악은 잠깐동안,


그렇다, 모든 음악은 잠깐이다.

소리는 생겨나자마자 사라지기 시작해

희미한 잔향으로 남아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의

원작 못지 않게 인상적인 후기에서

옮긴이 류재화가 쓴 표현처럼,

음악은 ‘현재 진행형의 상실’이다.


연주시간이 1분 남짓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건

혹은 말러와 브루크너의 교향곡이건,

아니면 주어진 악보를 840번 반복해야 하는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 짜증)⟩이거나

또는 2001년 연주가 시작돼

2640년경에나 마지막 음표가 울리게 될

존 케이지의 오르간을 위한 실험작

⟨ORGAN²/ASLSP⟩이든,


음표와 쉼표들은 만들어지자

허공으로 흩어지고,

음악이 존재하는 장소(라는 게 있다면)는

듣는 자의 기억 속일 뿐,

그마저도 주의깊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가뭇없이, 덧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그 잠깐동안,


2

Music for a while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그렇다, 그 잠깐동안 음악은

당신의 모든 근심을 잊게 할 수도 있다,


슬픔과 고통으로, 온갖 번뇌로 가득한

고달픈 생을 이끌어가는 이에게,

그래서 표현할 어떤 말도

찾지 못한 사람에게,

음악은 때때로 크나큰 위안이다.

 

음악은 ‘현재진행형의 상실’이지만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하기에,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돌이킬 수 없기에

음악은 누군가의 상실에 공명하며

위로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묻는다.

과연 정말 그러한가?


3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각색한

존 드라이든과 너새니얼 리의

영국판 ⟪오이디푸스⟫의 재공연을 위해

1692년 작곡한 극부수음악 중 한 곡인

⟨Music for a while⟩은

앞서 언급한 두 줄의 가사로 인해

간혹 음악이 주는 위안에 관한 노래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사실 음악을 들어보면

음악이 주는 위로에 관한 노래치고는

너무 무겁고 어두우며,

서늘하고 불길하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더구나 이어지는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가사들은 무슨 의미인가.


Music for a while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Wond'ring how your pains were eas'd

And disdaining to be pleas'd

Till Alecto free the dead

From their eternal bands,

Till the snakes drop from her head,

And the whip from out her hands.

음악은 잠깐 동안

당신의 모든 근심을 잊게 하네.

어떻게 그대의 고통이 덜어질까 궁금해하며

기쁨을 누리기를 거부하노니,

복수의 여신 알렉토가 죽은 자를

그 영원한 족쇄로부터 자유롭게 할 때까지,

그녀 머리의 뱀들이 떨어져나오고

그녀 손에서 채찍이 내려질 때까지.


4

존 드라이든과 너새니얼 리의

영국판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원작의 기본 흐름은 따르되,

몇가지 흥미거리를 추가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익숙치 않거나

혹은 기억이 희미하다면,

한글 위키피디아에 잘 정리되어있다.)


먼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에게는

또 하나의 자식, 딸 에우리디케가 있다.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에서

가져온 이름인 듯하다.

모든 이름의 표기는 그리스식으로 한다.)


오이디푸스의 외숙부이자

이제는 처남이 된 크레온은

조카인 에우리디케와 혼인을 원하고,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신탁에서 예언된

근친혼이 두려워 자식을 버렸던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근친혼은 안된다며 반대하기 전까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딱히 반대하지 않는다.


더구나 크레온은

오이디푸스가 전장에서 사로잡은

적국의 왕자 아드라스투스와

삼각관계로 갈등을 빚다가

극 막바지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그 과정에서 에우리디케도 죽는다.


이오카스테는 진실을 알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원작과 같으나,

이 과정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채

오이디푸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죽인다.

오이디푸스도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후일담에 따르면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세상을 떠도는 것과는 달리,

이 영국판에서는 죽음이 암시된다.

결론적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심지어 등장하지 않은 자식들마저)

모두 죽음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테베의 역병의 원인이 된,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밝히려

그의 유령을 소환하고,

죽은 라이오스는 분노에 차

오이디푸스의 죄를 낱낱이 밝힌다.

(선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해

죽은 왕의 왕비와 혼인한 자의 죄를

죽은 자의 유령이 나타나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햄릿⟫이 떠오른다.)


하지만 애초에 라이오스는

앞으로 낳을 아이가 자신을 죽이고

그 어머니와 혼인할 것이라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잉태시키고 그 아이가 태어나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부하에게 산으로 데려가 살해하라 명한,

오이디푸스 서사의 ‘원죄’를 범한 장본인임에도

굳이 유령으로 출현시켜

자신의 아들을 비난하게 하는 것은

극의 흐름에 필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당대 영국인의 취향에 편승한

군더더기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 영국판에 덧붙여진 요소들 모두가

소포클레스 원전의 명료함과 간결함,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긴장감이 고조되는

극적 구성에 비한다면

번잡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어쨌든 3막 1장의 이 장면,

테이레시아스가 라이오스의 유령을

불러내는 장면에서 불리우는 노래가

헨리 퍼셀의 ⟨Music for a While⟩이다.

(이상의 극 내용과 노래의 순서는

Google Books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1727년 출판본을 참고했다.)


5

이제 가사의 내용이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이 잡힌다.


음악은 잠시나마 근심을 잊게 하지만,

살해당한 자의 고통은 줄어들 수 없으며

어떤 안식의 기쁨도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복수의 여신 세 자매 중 하나인

알렉토(영원한 분노를 상징한다)에게

죽은 자, 다시 말해 라이오스를

잠깐이나마 죽음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


다시 노래의 첫머리로 돌아가본다.


Music for a while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동사 beguile의 어원은

기만하는 것, 속이는 것이다.

당면한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

잠시나마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가림하는 것.


음악은 슬픔으로 말을 잃은 자에게

때때로 위안이 될 수도 있으나,

말을 잃어, 말을 빼앗겨 슬픈,

말할 권리를 무시당하고 억압당하고

마침내 박탈당한 이에게는

오히려 기만적인 어떤 것이 된다.


파스칼 키냐르가 그의 에세이

“음악 혐오”에서 밝히듯,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으며,

‘음악은 최면을 걸어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어

‘듣고 있을 때, 인간은 한낱 수감자에 불과’하고,

 그리하여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인 까닭이기도 하다.

(“음악혐오”, 프란츠, 2017)

 

어쩌면 사실 음악이 줄 수 있는 위안이란

음악이 듣는 이를 기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지도 모른다.

‘지금–여기’의 고통의 시간을

음악에 내재한 시간으로 대체하기.

그럼으로써 우리가 겪는 슬픔과 고난,

근심과 고통이 없는 시간이,

다른 시간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음악은 우리를 현혹하여 마비시키고,

마취시킨다.

그러므로 문제는 음악이 주는 것이

위안이냐 기만이냐가 아니라

음악의 속임수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인지도 모른다.


6

You see? Life.

Yes, life sentence.

— 영화 ⟪Locke⟫ (2013)


스티븐 나이트 감독의 모노드라마 ⟪Locke⟫에서

주인공 아이반 로크는 ‘삶(Life)’을

‘종신형(life sentence)’에 비유한다.

(공교롭게도 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따지듯 묻는 상대는,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앉아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차의 뒷좌석, 다시 말해 허공이다.)


우리 각자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삶은

어떤 면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마치 오이디푸스가 피하고자 발버둥쳤으나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운명과도 같은 것.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삶이란, 숙명이란

자기자신이 아닌 타인인,

부모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는

이 형벌과도 같은 고단하고 남루한

지상에서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하여

그것이 결코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음악에, 음악이 주는 달콤한 위로에

잠시나마 의지하여

우리의 영혼이 숨돌릴 여유를,

마음의 안녕을,

찾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7

Music for a while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잠시나마 음악은

당신의 모든 걱정을 잊게 할 것이니.


이 노래는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

음악은 처음으로 돌아가

가사의 맨 첫 구절을 반복한다.


마치 살해당한 라이오스의,

그리고 이 노래를 듣는 당신의 현실 속의,

사실은 위로받을 수 없을 고통이

잠시라도 잊혀질 수 있을 것처럼.


그러므로 사실 저 두 줄의 가사는

어떤 단언이라기보다는 질문에 가깝다.


과연 당신은 음악의 현혹,

그 매혹적인 속임수에

기꺼이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찾고자 하는 위안은,

그토록 절박한 것인가.


그리고 동시에 음악은 요구한다.

 

이토록 덧없는 음악이 과연 무슨 수로

당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인지

당신이 가끔은 의문을 던지기를,

그리고 음악이 주는 그 잠깐의 기쁨을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기를.

(Wond'ring how your pains were eas'd

And disdaining to be pleas'd)


8

글 첫머리의 링크는

고음악 스페셜리스트로 높이 평가받는

영국의 소프라노 캐롤린 샘슨의 노래,

그리고 다음의 링크는

이 작품을 현대의 청중에게 널리 알린

영국의 카운터테너,

알프레드 델러의 노래다.


내 생각에 가장 적절한 해석으로 느껴지는

두 연주자 모두 영국인인 것은,

영국 극작가와 작곡가가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https://youtu.be/trOXaDeFe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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