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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Jun 10. 2023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Op.120

영원한 순환을 향하는 베토벤 만년의 걸작

Alfred Brendel의 연주


I change, but I cannot die.

I arise and unbuild it again.

— P. B. Shelley, ⟨The Cloud⟩ 중에서



#1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나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들을 때,

또는 모차르트 소나타 11번(K.331/300i)의

1악장을 연습할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변주곡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물론 어리석은 질문일 것이다.

바흐는 ‘여기가 끝’이라는 표지처럼

주제인 Aria를 마지막에 다시 반복하고

(Aria da capo),


모차르트는 여섯 번째 변주 이후에

짧은 코다 부분을 마련해 놓았으며,


베토벤은 29변주부터 31변주까지

느린 변주 뒤에 푸가인 32변주와

미뉴에트의 33변주로 결말부를

세심하게 짜 넣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본다,

변주곡의 ‘끝’이란 얼마간

임의적인 것이 아닐까.

이 작곡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또 다른 변주들을 추가로

덧붙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을 때 가끔

‘아리아 다 카포’의 마지막 음이 울린 뒤

제1변주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이야기일까.


왜 나는 여전히 이 모든 ‘끝’ 뒤에

또 다른 변주가 언제든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일까?


영원히 끝에 다다르지 않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치 셸리의 시 ⟨구름⟩에서처럼 그저

변할 뿐(change) 끝나지 않으며(not die),

언제나 새로이 생성되고(arise)

또 다른 종지로 해결되는(unbuild it)

그런 음악은 불가능한가.


#2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의

원제는 ⟨안톤 디아벨리의 왈츠 주제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1819년에서 1823년 사이 씌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출판업자이자 작곡가인 안톤 디아벨리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여성과 고아를 후원하기 위한

악보집을 출판하고자

베토벤뿐 아니라 슈베르트와 체르니,

훔멜, 루돌프 대공 등에게 작품을 의뢰한

짤막한 왈츠 풍의 주제에 의한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이 한 권으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 다른 한 권으로

편집돼 출판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이 피아노 독주를 위해 쓴

큰 규모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작품이며,

J.S.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함께

가장 위대한 변주곡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작곡된 모든 변주곡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도널드 토비),

“모든 피아노 작품 중에 가장 뛰어난 곡”

(알프레트 브렌델),

“베토벤 음악예술의 소우주”

(한스 폰 뷜로우)로 평가받으며,

특히 그의 32곡에 달하는

피아노 소나타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흔히 알려진 일화로

베토벤이 처음 이 주제를 접하고는

주제가 너무 진부하다며 거절했으며,

보수가 두둑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사실 근거가 별로 없다.

이 일화를 전한 안톤 쉰들러는

이것 외에도 왜곡되거나 과장된,

혹은 지어낸 일화들을 숱하게

남기지 않았던가.


베토벤은 의뢰를 받은 1819년 초반에

이미 네 곡의 변주를,

그리고 그 해 여름까지 19곡을 더해

우선 총 23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장엄미사⟩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들을 작곡하느라

잠시 손을 놓았다가

1823년 3~4월 경에 모든 변주곡의

작곡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작곡했던 23곡의 변주의

순서는 그대로 두고,

나중에 작곡한 변주들을

1, 2, 15, 23, 24~26, 28, 29변주와

31변주 및 33변주의 자리에 추가했다.


사실 주제를 들어보면

좀 진부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타인에 대해 그리 너그럽지 않았던

베토벤이 어쩌면 투덜거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찌감치 작곡에 착수할 만큼

표면적인 진부함보다는

(어쩌면 바로 그 진부함 덕분에)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이 썼듯이,

“그 싹이 빈약할수록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작곡가의 능력과 예술은 더 위대하”며,

“누구나 베토벤을 떠올리면 즉시

빈약하고 심지어 하잘것없는 동기를

숭고한 것으로 발전시켜가는 그의 기쁨을”

함께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A. 아인슈타인, ⟨음악에서의 위대성⟩, 102쪽


#3

넓은 의미에서의 변주란,

아마도 음악의 역사에서 아주 초기부터

사용된 기법이었을 것이다.


기악 변주곡은 14세기에 작성된

⟨파엔차 필사본⟩에 최초로 기록됐으며,

가장 오래된 ‘정선율에 바탕한 변주곡’,

18세기 유행한 ‘장식적 변주곡’ 등을 거쳐

우리가 익히 아는 형태의 ‘주제와 변주’라는

하나의 주요한 장르로 정착된다.


멜로디와 리듬, 화성, 음색 등을 변화시켜

익숙한 주제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많은 작곡가들이 경력 초기에

유명한 주제에 대한 습작을 쓰기도 하고

(베토벤은 12살에 작곡한

⟨드레슬러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스승인 네페의 추천으로 출판한 바 있다),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다양한 실험을 해 보는 일종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1801년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이듬해의 ⟨에로이카 변주곡⟩, 그리고

교향곡 3번 ⟨교향곡 제3번⟩ ‘영웅’의

관계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토벤은

만년의 작품들에서,

특히 피아노 소나타들과 현악 4중주들에서

푸가와 함께 변주곡을 그의 창조의

주요한 동인(動因)으로 삼는다.

어떤 면에서 푸가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을 따르는

특수한 형태의 변주 기법이라고 한다면,

만년의 바흐와 만년의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변주곡을 쓴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4

하지만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과는 달리

⟨디아벨리 변주곡⟩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세계에 좀 친숙한 뒤에야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 드러날 텐데,

이미 그의 피아노 독주작품은

소나타만 해도 32곡이고

(이런저런 별칭이 붙은 유명한 작품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변주곡과 바가텔 등의 소품까지 따진다면

⟨디아벨리 변주곡⟩까지 섭렵하기란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팬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나아가 바흐의 작품의 경우에는

워낙 주제부인 ‘Aria’가 잘 알려져 있지만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은

주제와 변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흔히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소개되듯이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18변주부터 끝까지)처럼

주제나 특정 변주를 따로 떼어

연주하거나 감상하기가 힘든 탓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디아벨리 변주곡⟩의

감상과 청취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른 장르에서도 그랬듯이 베토벤이

변주곡에서도 형식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인 탓은 아닐까.


더구나 연주시간이 50분을 훌쩍 넘는

주제와 33곡의 변주를 듣고 있노라면,

긴 시간을 내내 집중하기도 힘드려니와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조차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5

⟨디아벨리 변주곡⟩을 들을 때

아마도 가장 먼저 관심을 끄는 것은,

3/4 박자인 왈츠풍의 주제와

행진곡 풍의 제1변주(4/4박자) 사이의

그 크나큰 간극이 아닐까 싶다.

마치 원래 주어진 주제가 아니라 새로이,

자신이 쓴 제1변주부터 진짜 작품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처럼.

그리고 이어지는 제2변주의

스케르초 같은 잔망스러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두 변주는

이미 완성된 23곡의 변주곡에

1823년 추가됐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베토벤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실제로 디아벨리의 주제 뒤에 바로

제3변주(3/4박자)를 들어보면,

주제와 변주 사이의 연속성이

더 두드러진다.


제9변주에서 베토벤은 처음으로

조성을 C장조에서 c단조로 잠시 바꾸는데,

다음 변주부터 28변주까지 다시

C장조를 유지하다가

29변주부터 c단조로 전조되며,

32변주에서는 Eb장조의 푸가로

(그가 애용한 c단조-Eb장조 조합),

마침내 원래 조성인 C장조의

33변주로 마무리한다.


메이너드 솔로몬이 이 작품의

전체 구조를 분석하면서

1-8변주, 9-13변주, 15-19변주와

21-33변주로 그룹화하는 것은,

아마도 9변주에서 도드라지는

조성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또 윌리엄 킨더먼은

1-10, 11-24, 25-33의 세 그룹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세세한 분석은 이해하기 어렵기에

그만큼 베토벤의 이 변주곡이

변주곡을 넘어선 초월적 구조를

내포한다는 의미 정도로 파악할 수 있겠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종종 음반을 들으면서

1-13변주는 (소나타의) 1악장처럼,

14-20변주는 느린 악장인 2악장,

그리고 21-28변주는 3악장,

29-33변주는 4악장 또는 기나긴 코다로

나누어 듣는 경향이 있는데,

딱히 이론적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대한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많은 음반에서 연주자들이

느리고 장중한 제14변주에 들어가기 앞서

호흡이 길어지면서

곡 전반의 분위기가 확 바뀌며

(마치 소나타의 느린 2악장처럼),


21변주는 Allegro con brio로,

바로 앞 Andante인 20변주에 대비되면서

전통적인 소나타의 빠른 3악장에

어울리는 분위기다.


마무리 단계인 29-33변주는

c단조–Eb장조–C장조로 이어지는

화성적 변주와 함께

그의 후기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느린 변주와 푸가의 조합으로,

마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몽상적이고 명상적인 음악이

마치 하나의 악장이거나 코다 부분인 듯

느껴진다고 하면 조금은 변명이 될까.


(하지만 당연히 연주자마다 차이가 있어서,

정작 내가 좋아하는 알프레트 브렌델은

조금 다른 해석을 들려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다 하나로

연결된 구조를 보여주는 연주다.

그러니 끊어듣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각각의 변주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므로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고하거나

혹은 간단하게는 한글로 된 나무위키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29-33변주의 경우,

앞에서 이미 여러 차례 썼듯이

29변주와 31변주, 그리고 33변주와

바로 앞의 28변주는 나중에 추가된 것인데,

그만큼 베토벤이 전체 구조에 대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공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위의 추가된 변주를 생략하고

27변주(Vivace)와 30변주(Andante),

32변주(Fuga. Allego)를 이어서 들어보면

그 자체로도 설득력은 있지만,

한편으로 여느 변주곡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느린 변주가 29-31의

세 변주곡으로 확장되면서,

연주시간이 5분을 넘는 31변주를 포함해

8~9분 정도의 시간 동안 마치

듣는 이를 무중력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듯,

혹은 후기 소나타와 현악 4중주에서처럼

천상으로의 이행이나 영원으로 향하는

여로로 안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윽고 전통적으로

변주곡의 마지막으로 쓰이곤 했던

푸가(32변주)에 이르지만,

마지막 여섯 마디에서

Poco adagio의 경과구가 시작되며,

마지막 변주인 33변주로

끊김없이(attacca subito) 이어진다.


마지막 33변주는 3/4박자의 미뉴에트.

앞선 푸가의 진지함이 아니라,

조금은 가벼워진 스텝으로

이 곡의 원래 주제가 3/4박자의

왈츠였음을 어렴풋하게 상기시키지만,

춤곡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인

29-31변주의 연장선 상에 있다.

마치 이제 이 ‘춤곡’은

더 이상 디아벨리의 것이 아니라

완연히 베토벤 자신의 것이라는 듯

분명한 그만의 색채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으뜸화음은

비록 스포르찬도(특히 세게)로 끝나지만

이른바 ‘어둠에서 광명으로’,

비장(悲壯)에서 웅장(雄壯)으로의 드라마를

극적으로 마무리하곤 했던

베토벤의 중기 작품들을 떠올린다면,

더군다나 이 곡의 종반부가

그 유명한 c단조와 Eb장조의 조합을

거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조금 어색하다.


단 한 마디로 이 엄청난 여정의

마침표를 찍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는 이 화음을 들을 때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라는,

일종의 쉼표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오늘 밤에라도,

‘이 변주는 어떤가, 하나 더 써봤는데’라며

연주가 계속될 것만 같은.


#6

변주곡에서 마지막 종지란

소나타 형식에서처럼

그리 결정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제를 포함해 모든 변주에서

수많은 종지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변주의 종지화음이 울리더라도

그것은 언젠가 어디선가 겪었던 것.

종지에 이어 또 다른 변주가 시작되던

앞선 경험들과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마지막이 진짜 마지막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즉흥연주에 능한 연주자라면,

스스로의 변주곡들을 덧붙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다시 서두의 셸리의 시를 떠올려 보자면,

변할 뿐 끝날 수 없으며

언제나 새로이 생성되고

또 다른 종지로 해체되는 과정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듯한,

그런 음악.


제시–발전–재현의 소나타 형식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형성된

진보에 대한 믿음,

기승전결적이고 선형적인

목적론적 시간을 반영한다면,

변주곡은 어쩌면 이와 대비되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음악적 표현이 아닐까.

베토벤이 만년의 작품들에서

푸가와 변주곡이 많이 쓰게 된 것은

어쩌면 그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 바뀐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시간을,

그리고 ‘우리’조차 넘어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을

조금씩 깨닫게 되지 않던가.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에게 보낸

애정 어린 편지와 조언들,

조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은

어쩌면 지상에서의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끈을

붙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변주의 원리란 어떤 면에서는,

부모와 근본적으로 유사하지만

세대를 거치며 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패턴을 변주해 내는,

그래서 끝없이 삶을 이어가는

이 행성의 모든 생명체와도

조금은 비슷하지 않은가.


한 세대의 죽음은

다음 세대의 탄생을 야기하는 것,

한 변주의 종지는

다른 변주의 시작을 잉태하는 것,

그렇게 영원히 순환하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주제와 변주’와는 매우 다르지만,  

일종의 현대적인 변주 기법이라 할 만한

미니멀리즘의 작품들이 곧잘

자연 다큐 영화에서 식물의 생장이나

세포의 증식, 구름의 형성 등의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것 또한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인지도 모른다.)


#7

변주곡은 듣기에는 쉽게 느껴지지만,

실제 연주하기에는 매우 까다롭다.


변주가 바뀔 때마다 각각의 곡에서

마치 순식간에 가면이 바뀌는

중국의 전통극 ‘변검’처럼,

테크닉은 물론이거니와

호흡과 감정까지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곡에서는 무려 34번이나!)


더욱이 모든 변주는 한편으로는

각각 별개의 짤막한 작품처럼

연주되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모든 변주가

하나의 작품으로 들려야 하는데,

그러니 ⟨디아벨리 변주곡⟩이

베토벤의 피아노 독주 작품 중

가장 어렵다고 평가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와있는 음반 가운데

실망스러운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예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언제나 베토벤의 레퍼런스인

알프레트 브렌델(필립스, 1990) 덕분에

이 곡을 좋아하게 되었고

(처음 링크한 영상이 브렌델의 연주다),

이고르 레빗(소니, 2015)과

 안드라스 쉬프(ECM, 2013)는

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허원숙을 비롯해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루돌프 제르킨, 클라우디오 아라우,

다니엘 바렌보임의 두 번의 녹음,

블라디미르 펠츠먼, 마르틴 헬름셴,

폴 루이스 등 모든 녹음에서

고유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연주시간이 55분에서 1시간가량인 데다

워낙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 곡의 특성상

음반에 다른 곡을 같이 싣기 애매한데,

허원숙의 음반(DUX, 2017)에는 류재준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모음곡⟩이 수록됐다.

특히 모음곡의 첫 번째 곡이 푸가라서

33변주를 축으로 삼아

베토벤의 32변주(푸가)와

묘한 대칭을 이루는 것이 흥미롭다.

연주 역시 훌륭하니 들어보시길 권한다.


유사하게 루돌프 부흐빈더는

2020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애초 디아벨리가 출판할 때

훔멜과 리스트 등 다른 작곡가들이

썼던 작품들 가운데서 몇 곡을 비롯해,

현대 작곡가들이 새로 쓴 작품들을 포함

19곡을 추가로 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변주곡’이라는

나의 상상과도 맥이 통하는 구성이다.


안드라스 쉬프는

마지막 소나타인 32번을 먼저 연주하는데,

⟨디아벨리 변주곡⟩ 직전에 쓰였으며

흔히 지적되는 이 변주곡의 느린 변주들과

소나타 2악장 아리에타와의 연속성을

잘 보여주는 음반이다.

쉬프는 ⟨디아벨리 변주곡⟩을

두 번 연주한다.

첫 번째는 1921년 산 벡스타인 피아노로,

두 번째는 1820년경 생산된

브로드먼의 포르테피아노로,

베토벤 당대의 피아노의 음향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이고르 레빗은 ⟨디아벨리 변주곡⟩과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미국의 현대 작곡가인

르젭스키의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같이 녹음했다.

마지막 곡의 원곡은

칠레의 민중가요 그룹인 낄라빠윤의 노래,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이다.

세 곡 모두 기량 면에서나 해석 면에서

탁월한 앨범이다.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 ⟨음악에서의 위대성⟩, 강해근 옮김, 포노, 2020


⟨라루스 세계 음악 사전⟩ 탐구당, 1998 중 “변주곡” 항목


영문 위키피디아의 ⟨디아벨리 변주곡⟩ 항목


영문 위키피디아의 ⟨파엔차 필사본⟩에 대한 항목


나무위키의 ⟨디아벨리 변주곡⟩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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