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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Op.61), 차이코프스키(Op.35),
브람스(Op.77)와 슈만(WoO 23),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6),
모차르트의 2번(K.211)과
4번(K.218)을 비롯해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1번(Op.19)과
코른골트(Op.35)에 이르기까지,
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D장조(라장조)가 많은가.
뿐만 아니라
이 못지 않게 사랑받는
시벨리우스의 협주곡(Op.47)과
J. S.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BWV 1043),
하차투리안의 협주곡(Op.46)은
같은 으뜸음을 쓰는 단조인 d단조이다.
왜 바이올린 협주곡은 D를 으뜸음으로 하는
장조와 단조로 많이 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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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음악사와 화성학, 관현악법과
작곡법 등에 정통해야 할 것이므로
내가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전문가로서 그간 찾아보고
이것저것 궁리해본 바에 따라
아주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D는 바이올린의 4개의 현 가운데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은 아래에서부터,
그러니까 연주자의 몸쪽으로부터
G3 - D4 - A4 - E5로 조율한다.
(참고로 C4~C5가 우리에게 익숙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역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어떤 이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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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개방현은 당연하게도,
왼손으로 현의 어딘가를 짚은 음보다
더 맑고, 더 음량이 크며,
더 순수한 음을 연주할 수 있다.
개방현이 어떤 곡의 으뜸음이라면,
대개 으뜸음으로 끝나는
종지(終止, cadence)에서
가장 명료하고 강렬한 음향으로
끝맺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이올린 협주곡은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음악.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악기는 현악기군이고,
D는 비올라의 위에서 두 번째 현(D4)이며,
첼로의 위에서 두 번째 현(D3)이자,
더블베이스의 위에서 두번째 현(D2)이다.
그러므로 한 번 더 단순화자면,
독주 바이올린과 모든 현악기군이
옥타브 간격의 개방현으로
종지부의 으뜸음을 총주(總奏)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론적으로만 그렇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종지는 으뜸음 단음이 아닌
화음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으며
무엇보다 능숙하게 훈련된 연주자들은
톤의 컨트롤을 위해,
그리고 연주 중에 불가피하게
조율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개방현 연주를 피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또는 들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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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깊이 들어간다면,
피타고라스 이래로
으뜸음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딸림음(5도 위의 음, 여기서는 A) 역시
개방현으로 얻어질 수 있고,
그 음의 딸림음(E)까지
개방현으로 연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조바꿈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5도와 2도, 고전적인 II - V - I 종지가
악기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다시 말해 튜닝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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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
나머지 개방현인 G도, A나 E도
마찬가지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앞의 D장조와 d단조 작품들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되며 사랑받는
멘델스존의 협주곡 Op.64는 e단조이고,
브루흐의 협주곡 1번(Op.26)은 g단조이며
(그보다 덜 알려진 2번 Op.44와
3번 Op.58은 d단조),
무엇보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Le quattro stagioni)”의
‘봄’과 ‘여름’은 각각 E장조와 g단조이다.
(참고로 ‘가을’과 ‘겨울'은
각각 F장조와 f단조이다.)
또 J. S. 바흐의
1번 협주곡(BWV 1041)은 a단조,
2번(BWV 1042)은 E장조이며,
모차르트의 5번 ‘Turkish’(K. 219)는 A장조,
3번(K. 216)은 G장조이고,
쇼스타코비치의 1번(Op.77)은 a단조,
비외탕의 협주곡 7곡 가운데
2번(Op.19, f#단조)을 제외하면
모두 E, A, D, G가 으뜸음이다.
요약하자면
D만큼이나 A와 G, E음도
바이올린 협주곡의 조성으로
곧잘 사용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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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 중에서도
유독 D장조와 d단조 곡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까?
다시 한 번 단순화하자면,
D음은 바이올린의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라서 그렇다.
다시 말해
왼손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높은음자리표 상의
D4에서 한 옥타브 위의 D5를 지나
더 위로는 B5까지 연주할 수 있고,
그리고 아래로는 버금딸림음인
낮은 G까지 내려갈 수 있으니,
아찔하게 솟구치는 악구들 뿐만 아니라
숭고하며 웅장한 저음부의 패시지를
왼손의 기본 포지션 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현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아닐까.
특히나 왼손의 포지션이
기본 위치에 가까울수록,
다시 말해 목(neck)에 가까울수록
더 투명하고 또렷하며 풍부한 음색을
얻을 수 있다.
(브리지 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좀 ‘신경질적인’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이는 곧 같은 소릿결을 가진
오케스트라 내의
수많은 현악기들 속에서
조화로움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독주 바이올린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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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교육자였던
에른스트 파우어에 따르면
D장조는 위풍당당함, 장엄함,
위엄과 승리, 축제와 행진곡의 느낌,
그리고 장중함 등을 표현한다.
(Maureen Buja, “How You Should Feel
in the Key of D Major”.
https://interlude.hk/feel-key-d-major/ 참고)
독일의 시인이자 음악가
크리스티안 슈바르트 역시
D장조에 대해 마찬가지의 특징과 함께
교향악과 행진곡이 내재돼 있다고 설명하며,
d단조에 대해서는 멜랑콜리와
여성적인 특성, 비장함과 유머를 들고 있다.
(https://wmich.edu/mus-theo/courses/keys.html 참고.)
사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평균율에 의한 조율이 정착되기 전,
혹은 순정율로 연주할 경우에 느껴지는
D장조의 속성일 수도 있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D장조 자체가
현악기군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오케스트라에 최적화된 조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D장조는 현악기에 어울리고,
그래서 작곡가들이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바로크와 초기 고전 시대의 교향곡과
관현악에 많이 사용하고,
그러다보니 위풍당당한 D장조라는
일종의 정서적 바탕이 마련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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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성에 각각 정서적, 감정적 특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낭만주의적인 과잉해석이 아닐까 싶지만,
그럼에도 아마도 D장조와 더불어,
어쩌면 오히려 그보다 더 특징적일
Eb장조(내림마장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을 수 없겠다.
Eb장조는 흔히 ‘영웅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일명 “영웅(Eroica)”이라는 별칭이 붙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Op.55)의 영향이
아무래도 매우 크겠으나,
그 이전부터 귀족들의 사냥 여행에 앞서
연주되던 이른바
“사냥(le chasse) 교향곡”은
대부분 Eb장조였고,
이는 Eb장조가 관악기, 특히 금관악기가
앞에 나서기 좋은 조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과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을 비롯해
많은 호른과 트럼펫 협주곡이 Eb장조이며
고전 시대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Eb장조가 상당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이 악기들의 조음(調音)과 연주 원리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Eb장조가
(현악기의 D장조와 마찬가지로)
이 악기들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용이하고 적합한 조성이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른과 트럼펫과 같은 금관악기는
전쟁과 사냥에 관련이 깊으며
(이 악기들이 돌격이나 퇴각을 알리는
수많은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 보라),
특히 사냥 교향곡과 같은 경우는,
근현대의 브라스 밴드의 행렬처럼
야외에서 연주되곤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관악기들이 중요했으므로
Eb장조라는 조성이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관악기들은 기본 조성이
여러 가지인 경우가 많으며,
바로크에서 고전을 거쳐 낭만으로 오면서
많은 변화와 개량을 거쳤기에
이 또한 그저 비전문가의 아주아주
단순화된 추측임을 (변명삼아) 덧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