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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Oct 28. 2022

막스 리히터: Maria, the Poet(1913)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1

하루의 언제든, 한 주나 혹은 어느 계절에든

부디 나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주길, 이 단순하고 궁극적인 이유로:

나도 언젠가 죽을 테니.

—마리나 츠베타예바


2

누군가의 목소리는 늘

그 사람의 몸을, 지금-여기 존재하는

신체를 전제한다.

아니, 전제했었다,

근대의 축음기술과 전신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너선 스턴의 책 ⟨청취의 과거⟩에 따르면

”음향 재생은 [...] 신체에서

목소리를 (잠깐이나마) 분리하는 것”이고

때문에 그토록 “충격적인 일”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말을 건네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담는 용도로

홍보되고 사용된 초창기의 축음기는

일종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음향 레코딩은 일종의 방부 처리”이다.


녹음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언제나 과거의 목소리,

(음성의 주인공을 내가 모를 뿐 아니라

추가적인 정보가 없다면)

지금은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인물들이

‘지금-여기’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유령과도 같은 환영이라면,

모든 목소리는 사자(死者)의 목소리.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우리 모두가 그렇듯

그리 멀지는 않은 미래에

떠날 것이거나.


3


이런 목소리.


어느 러시아 벽지의 외딴,

부엌과 거실과 심지어 침실마저

한 칸의 공간에 욱여넣었을 법한

낮은 지붕의 낡고 어두운 돌집 탁자에서

조그맣게 흘러들어오는 빛을 배경 삼아,

살아온 이야기를 중얼거리듯

나지막이 들려주는,

메마른 울음 같은,


목소리.


4

내가 이 음악을 들으면서

아마도 삶과, 필경은 죽음을,

망자(亡者)의 전언을 떠올리게 된 것은

내게는 너무나 낯선 언어인,

표기와 발음까지 생경한

러시아어 텍스트를 읽어주는

60~70대는 좋이 되었을 노인의

목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작곡가 막스 리히터의 첫 음반,

⟪Memoryhouse⟫(2002)의 두 번째 트랙

⟨Maria, the Poet (1913)⟩에 쓰인

이 텍스트는,

1892년 태어나 1941년 사망한

러시아의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시.

(‘마리나’가 이 곡의 제목에서

‘Maria’로 바뀐 까닭은 알 수 없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이어진

궁핍한 시절 딸이 굶주려 사망하고,

1922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 베를린, 프라하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39년 고국으로 돌아가지만

간첩으로 몰려 남편은 처형당하고

또 다른 딸은 구금되었으며,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끊게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시인.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대체로 러시아 상징주의에 맥이 닿아있고

실험적 문체와 종지 부호의 사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서정성,

나아가 시대의 삶을 포착하는 정신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전한다.


5

첫 행으로 제목을 삼는

유럽의 많은 시들처럼,

이 시는

Уж сколько их упало в эту бездну,

영어로는 How many has this chasm

already swallowed...로

종종 소개되곤 하는 것 같다.

대략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이 절망의 심연이 이미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삼켜버렸는지’일 텐데,

‘심연(chasm; abyss)’이란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필멸의 존재로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다.

음악 타이틀에 쓰인 숫자처럼,

1913년에 씌어졌다.

(다음의 링크에서 시의 원문과 여러 버전의

영역본을 읽을 수 있다: ruverses.com)


19살의 시인이

이토록 깊고 영원한 슬픔 속에서

(For my eternal sadness, so profound

Though I am just nineteen)

세상의 모든 죽음에 대해,

이미 죽은 이와 앞으로 죽을 이에 대해,

나아가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삶을 향해 노래하는 것이다.


At any time of day, or week. or season,

Please also try

To love me for this last and simple reason:

For I will die.

서두에 인용한 이 마지막 연처럼

언젠가 사라질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또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란

그토록 단순하고 자명하다.


막스 리히터의 쓸쓸한,

황혼 무렵 겨울 벌판 같은 음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모든 것을 감싸안는 듯한 음악으로

전환되고 마무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당연해 보인다.


6

비발디의 사계에 대한 미니멀리즘적인

재작업(recompose) 앨범이나,

최근의 ‘잠들기 위한’ 음악의 모음인

⟪Sleep⟫ 모음곡들로 아마도

당대의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현대음악 작곡가 중의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막스 리히터이지만,


아마도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각인시킨 것은

영화 ⟨셔터 아일랜드⟩(2010)에 쓰인,

⟨This Bitter Earth / On the Nature of

Daylight⟩이 아니었을까.



7

디나 워싱턴이 1960년 발표한 노래

⟨This Bitter Earth⟩와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음악은,

여러 모로 앞서 이야기한

⟨Maria, the Poet (1913)⟩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느껴진다.


현악 앙상블의

미니멀한 구조도 그렇지만

여성의 목소리에 음악이 입혀진 것,

나아가 곡의 가사 역시도 그렇다.


 이토록 모진 세상(this bitter earth)에서,

과연 사랑의 쓸모가 무엇인지

(what good is love),

도대체 ‘나’의 쓸모는 무엇인지

(what good am I),

삶은 장미의 광휘보다

먼지에 더 가까운 것 같지만,


나의 내면에서 울부짖는 목소리에

누군가는 응답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알고 보면 그리 고단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

(But while a voice within me cries

I'm sure someone may answer my call

And this bitter earth

Ooh, may not, oh, be so bitter after all)


그렇다, 다시 한번,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곤고한 삶을 견디다

마침내 죽어 심연으로 삼켜지는,

미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디나 워싱턴의

리듬 앤 블루스 원곡 버전은,

막스 리히터의 버전보다

훨씬 낭만적이며 밝고 긍정적이다.)


8

낡은 축음기에 녹음된

누군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은,

특히 녹음된 음원을 통해 만나는 음악은

늘 일종의 ‘과거의 문턱’을 넘어,

‘죽은 자의 목소리’와도 같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대조적으로 실황연주를 live라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종교용어를 빌자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승천을 다루는 전례(Anamnesis),

그리스 단어 anamnēsis, 

‘기억하기’에서 연원한,

망각하지(amnēsia) 않기(an-)의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옥스포드 사전의 Anamnesis의 뜻풀이인

‘recollection(다시-떠올리기)’은

결국 ‘다시-살아나게 하기’이고,

완전한 즉흥연주가 아니라면

모든 음악은 악보에 적혀있거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소리들을,

사라지는, 또는 이미

사라진 것들을 되살려내는

애도의 작업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일종의 ‘부활’의 의식이다.


 서두에 인용한,

제법 으스스하게 들리는

“방부처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거창한 서사는 아니더라도,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삶이 애틋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나아가 부디 바라건대,

마침내 우리가 이 비통한 삶을

사랑할 수 있기를,

서로를 아껴줄 수 있기를.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나의 음악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

죽음과 연관된 것에 대한

하나의 변명일 수도 있겠다.)




참고한 문헌과 링크는 다음과 같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0


‘과거의 문턱’이라는 표현은 최근 출판된,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사진에 관한

인상적인 에세이집의 번역서 제목이자

그가 본문 중 쓴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

김남시 옮김, 열화당, 2022 참조.


다시-떠올리기, 다시-살아내기로서의

전례인 Anamnesis에 관련한 내용은,

캐슬린 하먼, ⟨전례음악의 신학⟩,

이상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2을 참고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링크들:

https://en.wikipedia.org/wiki/Marina_Tsvetaeva


https://ruverses.com/marina-tsvetaeva/how-many-has-this-chasm-already-swallowed/


https://genius.com/Dinah-washington-this-bitter-earth-lyrics 




동영상들은 일부러

슬라이드 쇼나 비디오 작업 등이 없는,

앨범 표지 사진만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굳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음악의 상상력을 제한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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