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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Aug 18. 2024

조르주 비제, ⟨교향곡⟩ C장조

17살 청년 작곡가의 수작(秀作) — 아르카디아의 사계를 상상해 보다

비제 ⟨교향곡⟩ C장조 중 2악장 Adagio | Bernard Haitink,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1

나직하게 깔리는 호른과 현,

그 위로 누군가를 부르는,

혹은 회합을 알리는 신호처럼 울리는

목관(플루트, 클라리넷, 바순)의

12마디의 인트로에 이어 이윽고

홀연히 등장하는 오보에의 매혹적인,

아련하고 나른하며 평화로운,

나아가 무엇보다 이국적인 선율.


‘Idyll’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늘, 다른 무엇보다

비제의 ⟨교향곡⟩ C장조의

2악장 Adagio가 생각난다.


어느 나른한 여름날

고대 그리스의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서

목신(牧神) 판(Pan)의 주도로 벌어진

음악 회합의 한 장면이라면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2

‘Idyll’은 보통 ‘목가(牧歌)’ 또는

‘전원시(田園詩)’ 정도로 번역되지만,

현실세계의 양치기 목동이나

사실적인 전원의 풍경이 아니라

행복하고 평화롭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이상향,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거나

현재진행형으로 파괴되고 있는,

되찾을 수 없는 낙원을 의미한다.


헤시오도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고통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순박하며 평화롭게,

아직 신과 님프, 정령과 같은

신화적 존재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던 시대,

이른바 ‘황금시대(Golden Age)’에

존재했을 법한 상징적인 공간인 것.


아니, 어쩌면 ‘Idyll’은 단순히

공간적인 어떤 것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이미 흘러가 버린

그 옛날의 좋은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머금고 있다.


3

다시 비제의 교향곡 2악장으로 돌아가면,

오보에의 선율 라인은 다음과 같다.


비제 ⟨교향곡⟩ C장조 중 2악장 Adagio의 주제 부분 | 출처: imslp.org


오보에라는 악기 자체가

워낙 고아(高雅)한 구석이 있는 데다,

위 그림 세 번째 마디의

반음계 진행으로 인해

독특하고 이국적으로 들려서,

이제는 잊혀진 고전 고대(古典 古代)의

선법(mode)이 과연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을 선사한다.

(공교롭게도 훗날 드뷔시가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역시

반음계적 진행으로

이국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라루스 세계음악사전⟩에 따르면

오보에는 “옛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쓰여왔으며”,

“그리스인이 사용했던 아울로스도 […]

플루트가 아니라 오보에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고 할 만큼,

두 장의 리드(reed)가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태곳적부터 인류와 함께 한

풀피리 소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오보에의 선율이 인상적인

비제의 ⟨교향곡⟩ C장조를 들으며

목신(牧神)과 이상향으로서의

전원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특히나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장소인

아르카디아(Arcadia)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4

비제가 17살인 파리음악원에서

샤를 구노에게 수학하던 시절인

1855년 작곡한 ⟨교향곡⟩ C장조는

아마 ‘과제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음악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하듯

그가 존경해마지 않던 스승

구노의 영향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탓인지

(특히 한 해 전 발표된 구노의

⟨교향곡 1번⟩ D장조에서 빌려온

아이디어가 꽤 많다고 한다),

스스로도 작품이 실제로 연주되거나

출판되거나 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고,

사후 레날도 안(Reynaldo Hahn)에게

건네진 악보가 음악원 서고에 묻힌 채

오랜 세월 잊혔다가 1933년 재발견된 후

1935년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 의해

바젤에서 비로소 초연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보면

구노의 교향곡이 당대의 유행과

프랑스적 취향을 충실히 따른

대중적 악곡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비제의 ⟨교향곡⟩ C장조는

보다 독일-오스트리아적이며

악곡을 풀어가는 솜씨와

다채로운 관현악법에 있어

스승의 작품을 능가하는 것 같다.


초연 이후 낭만시대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 잡으며 인기를 끌었고,

선율에 있어서의 창의성과

주제와 악기군을 다루는 능력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17살 청년 작곡가의 수작(秀作)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며,

간혹 멘델스존이 비슷한 나이 작곡한

⟨한여름밤의 꿈⟩ 서곡에도 비견된다.


비제 ⟨교향곡⟩ C장조 전곡 | Gordan Nikolić이 이끄는 Netherlands Chamber Orchestra의 실황 연주


5

스승 구노의 영향을 차치하고라도

1악장 Allegro vivo는 어떤 면에서

하이든과 베토벤의 그림자가 느껴지고

(특히 같은 조성인 C장조의

베토벤의 ⟨교향곡 1번⟩),

스케르초 악장인 3악장에서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5악장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기쁨과 감사’에서

묘사하고 있는 농부들의 춤이 떠오르며,

피날레 악장(4악장)의

민첩하고 날랜, 일면 잔망스러운

현악 파트의 움직임에서는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나

극부수음악 ⟨한여름밤의 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전체 악곡이 엄청나게 독창적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모자란 점이 있다.

하지만 ⟨라루스 세계음악사전⟩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비제의 음악은

“우아하고 힘찬 악상, 정확한 어법,

뛰어난 드라마를 암시하는 능력,

[…] 진실에 대한 깊은 배려, 그리고

현실에 대한 관심”이 특징적이며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악보를 만들었고,

개성적인 색채를 만들어

그 색채를 교묘하게 조합”하는

솜씨가 탁월한데,

⟨교향곡⟩ C장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마치 눈을 감으면 그림이 절로

그려질 법한 매혹적인 선율과 더불어

목관악기와 현악기를 자유자재로,

다양한 색채를 만들어 내는 솜씨가

충분히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2악장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아니, 전체 교향곡 역사에 있어서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악곡이

아닐까 싶다.


앞서 설명한 목관악기군이

주로 역할을 맡는 제시부에 이어

발전부에서는 현악기들만으로

(1,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조금은 구슬픈 선율을 노래하는데,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살짝 생각나기도 하는,

비가(悲歌; elegy)에 가까운 음악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Idyll(목가, 전원시)’이란

이미 잃어버린 이상적인 공간/시간을

노래하는 것이니,

회한 섞인 비탄 역시 그 한 부분임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비제 자신도 2악장은 마음에 들었는지,

훗날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가운데

2막 나디르의 아리아,

‘De mon amie, fleurs endormie’에서

오보에 솔로의 선율을 재활용했다.


6

느긋하고 나른하며 평화롭지만,

조금은 서글픈 2악장에 이어지는

3악장 스케르초는 경쾌한 춤곡인데,

궁정의 우아한 춤이 아닌

농부와 목동, 그리고 어쩌면

정령과 님프가 함께 추는

순수하고 질박한 원무(圓舞)에 가깝다.


그러나 최근 이 곡을 듣다가 문득,

3악장의 춤을 수확철의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것으로

해석한다면,

어쩌면 이 곡 전체를 일종의

‘비제의 사계’ 정도로 듣는 것도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1악장은 무릇 전체 작품의

씨앗이 되는 악장이니 봄일 테고,

2악장의 나른한 평화로움은 여름,

3악장은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한 가을,

그리고 4악장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전체악곡을 마무리하는) 겨울로,

마치 비제가 음악으로 묘사하는

‘아르카디아의 사계’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물론 전체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취한

교향곡 작품을 이렇게 표제음악적으로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지만,

네 개의 악장 각각을 들으며 나름대로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7

비록 처음 링크한 2악장의 연주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였고,

전곡 연주는 실황을 고르느라

네덜란드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이기는 했지만,

녹음된 음반을 살펴본다면

샤를 뮌슈(파리 ORTF 내셔널 오케스트라),

샤를 뒤투아(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조르주 프레트르(밤베르크 심포니),

네빌 마리너(세인트 마틴인더필즈),

토머스 비첨(프랑스 국립 라디오방송

오케스트라),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등이

훌륭한 선택일 듯하다.


아무래도 비제가 프랑스인이다 보니

프랑스 내지는 타국의 프랑스어권 악단이

많이 연주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목관악기 연주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2악장에서 특히 빛나는 오보에는

영어 명칭(oboe) 자체가

‘haut(높은)’와 ‘bois(나무)’가 합쳐져

‘높은 음역대를 맡는 목관악기’라는 뜻의

프랑스어 ‘hautbois’(오부아, 로 발음한다)

에서 유래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8

참고로 그가 남긴 또 다른 교향곡인

이른바 ⟨로마 교향곡⟩ 역시 C장조로,

22세에 시작해 33세가 되던 해

대체로 마무리지었으나,

스스로 불만족스러워하며

끊임없이 수정하다가 세상을 떠난 탓에

비록 미완성은 아니지만,

작곡가의 결정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앞서 작곡한 ⟨교향곡⟩ C장조만큼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라루스 세계음악사전⟩, 탐구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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