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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Oct 03. 2021

하이든,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1

당연한 이야기지만

종교음악을 좋아하기 위해

종교를 가질 필요는 없다.


하이든이 1785~6년 사이

스페인 카디스의 한 교회로부터 위촉받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역시

어떠한 믿음과 상관없이

감상하고 좋아할 만한 작품이다.


2

원래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서주와 후주인 “땅이 울리다”에 둘러싸인

7개의 소나타로 구성돼 있는데,

각각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에 해당한다.

 

하이든이 훗날, 아마도 1801년에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사에서 출판된

오라토리오판 악보에 밝힌 바에 따르면,

카디스의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

검은 천으로 창문과 벽, 기둥을 감싼 뒤

단 하나의 램프 만을 밝혀둔 채로,

사제가 일곱 말씀에 대해

하나씩 읽고 강론한 뒤

각각의 말씀에 해당하는 소나타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야말로 악기들로 올리는 기도이자 묵상,

삶과 죽음의 근원에 대한 음악적 사유.


3

아다지오에 대한 앞의 글에서도 썼지만

기도와 묵상에 아다지오 만큼 잘 어울리는

악상기호가 또 있을까.


하이든은 앞에 언급한 악보 서문에서

청중을 지루하게 하지 않으면서

7곡의 ‘아다지오’로 작품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7개의 소나타가 각각

Maestoso ed adagio,

Largo, Grave e cantabile,

Grave, Largo, Adagio와

Lento로 구성돼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하이든이 느린 곡들 사이에서

빠르기와 전체적인 느낌을 조정하기 위해

다양한 악상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소나타가

아디지오의 정서를 바탕으로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든의 말마따나 1시간 가량의 작품을

빠름과 느림의 조화 없이도

적절하게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그는 뛰어난 작품을 완성했으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그의 말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공치사 정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독일어 제목으로는

<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이며,

영어로는

<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로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네 글자의 한자어로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한다.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두번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번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네번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흔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도

잘 알려진 구절이며,

다섯번째는 ‘내가 목마르다’,

여섯번째 ‘다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구성된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얕은 관계로

각각의 말씀에 대한 한글 번역은

하이든의 이 작품에 대한 입문서인

강신덕, “이 사람을 보라”(토비아, 2021)를

참고하여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5

앞서 언급했듯이 원래는 관현악곡으로

1786년 완성돼 이듬해인 1787년 출판됐으나,

같은해 하이든 자신이 현악4중주로 편곡했고,

건반악기를 위한 버전은 누군가에 의해

완성된 초안을 하이든이 감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수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첨삭이 있었는지,

또 원래 초안을 만든 작곡가는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강신덕의 “이 사람을 보라”에는

체르니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고,

악보 사이트인 imslp.org의 악보 가운데에도

체르니 편곡으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가 아는 카를 체르니는

이 곡이 출판된 이후인 1791년 태어났으니,

내가 모르는 다른 체르니가 있었거나

아니면 이 곡의 다른 편곡버전이 있거나,

혹은 그저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는 듯하다.


현악4중주와 피아노 버전의 악보 모두

1787년 출판되었는데,

피아노판은 감수했다고는 하지만

헨레(Henle)에서 나온 Urtext 악보의

서문에 인용된 하이든의 편지에 따르면

그 자신은 출판된 악보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첫 작곡의 10년 뒤인 1796년에는

오라토리오판을 작곡해 1798년 초연되고,

1801년에 악보를 출판한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린만큼

작품이 밝을 수는 없겠으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의 죄를 사하고,

강도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이 땅에 와서 이루고자 한 것들을

스스로의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신께 영혼과 육신을 내어드리는 과정,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일곱 말씀이란 절망과 원망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 깨달음과

궁극적인 초월로의 과정이기에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차분함과 위로, 용서의 정조다.


간혹 불안한 조성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는데,

 물론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거둔 후,

땅이 흔들리고 성전이 갈라지는 후주,

c단조의 Il terremoto(땅이 울리다)는

예외가 되겠다.


7

하이든은 7개의 소나타에서

각각의 말씀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기초삼아

악상을 전개시키는데,

이 모티브들의 반복으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서의 모진 고통의 시간,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없이 외는,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진다.


각각의 소나타가 모두 매력적이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의 대화인 세번째 소나타와

여섯번째 소나타인

‘Consummatum est(다 이루었다)’이다.  


E장조의 세번째 소나타

‘Mulier, ecce filius tuus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의 첫 주제는

마치 아들이 어머니에게,

또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하는 위로처럼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를 닮았다.

“라루스 세계음악사전”(탐구당, 1998)에서는

불확실한 조성과 불의의 전조, 싱코페이션 등으로

표현상 불안한 곡으로 설명하지만,

나는 일곱 곡 가운데서도

가장 다정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번째 소나타,

‘Cosummatum est(다 이루었다)’는

단독으로 듣기에도 전혀 손색 없을만큼

구성이 매력적이지만,

 특히 g단조(사단조)로 시작해

같은 으뜸음조인 G장조로 끝난 뒤

다음 곡인 7번째 소나타에서는

장3도 아래의 이른바 ‘영웅적’인

Eb장조(내림 마장조)로 이어지고

마지막 후주 ‘Il terremoto’에서는

그와 나란한 조인 c단조로 끝맺음하니,

이 영웅적이지만 비극적인 드라마의

종결부로 훌륭한 선택일 수밖에.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것은

여섯 번째 소나타에서 계속 들려오는,

 하행하는 16분 음표 네 개에 이어지는

8분음표 네 개의 상승음형,

또는 그것의 변형으로 이뤄진

악구의 반복적인 패턴이다.

악보출처: http://imslp.org

육신의 힘이 다해 자꾸 떨궈지는 고개,

그러다 문득 기운을 내어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이거나,

혹은 아직 못다한 일들이 남은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몸짓이거나,

16분음표의 하강과 8분음표의 상승음형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는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망설임과 주저,

끝까지 지상의 인간들을 염려하는

고뇌에 찬 시간을 마치 음표로 그려내듯

생생하게 전달한다.


8

관현악 버전이나 현악 4중주도 그렇지만,

피아노 독주를 위한 편곡은

더욱더 명상적이다.

아마도 여러 다른 연주자들이

함께 해야하는 관현악이나 4중주와 달리,

홀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야 하는

악기여서 그런 것일까.

마치 십자가 위의 시간은 결국

오롯이 예수 혼자 겪어내야만 하는

것이었듯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이 곡이 가장 사랑받는 편성은 현악4중주지만

나는 피아노 연주 앨범을 듣고 나서야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초급 수준이지만

언젠가 피아노를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연주해보고픈 바람도 작용했을 테지만.)


9

아는 게 부족하니

뭐라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 곡의 현악4중주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들이 떠오른다.


후기 현악4중주들에서

느린 악장들의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이 돋보이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현악4중주 14번 c#단조, Op.131의

느린 안단테 악장인 4악장의 변주곡은,

전체 악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가장 크고,

모티브의 반복이라는 변주곡 특성상

하이든의 “일곱 말씀”과 참으로 닮았다.


더구나 14번은 전체 7악장이고,

4악장의 변주곡 역시 7개의 변주라고 하니

하이든의 7개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또 15번의 느린 3악장(Molto adagio)에는

1824~5년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베토벤이

‘병에서 회복한 사람이 신께 바치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라는

문구를 적어넣었으니,

대푸가를 포함해

후기 현악4중주를 작곡하던 당시

만년의 베토벤이 어쩌면

숙명처럼 다가오던 죽음의 그림자를,

삶과 죽음에 대한 기도와 묵상을

이 작품들에 담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도 죽음 앞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담아낸

하이든의 “일곱 말씀”에서

자꾸 훗날의 베토벤 4중주들이

연상되는 것이다.

 

10

이 곡의 건반악기 연주를 추천한다면

하이든 해석으로 유명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존 맥케이브(John McCabe),

그리고 시대연주로 포르테피아노 앞에 앉은

로날드 브라우티험(Ronald Brautigam)을 꼽겠다.

현악4중주 연주는 에머슨 4중주단과

보로딘 4중주단의 연주라면

훌륭한 시작이 될 것이다.


낭만시대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합창 버전에 밀려

연주횟수도 얼마 되지 않고

현대적 악보도 드물었다던 관현악 버전은,

다행히 시대연주의 붐과 맞물리면서

좋은 녹음들이 많이 나왔다.   

프란스 브뤼헌과 18세기 오케스트라,

그리고 조르디 사발의 음반이 좋았으며

사발의 연주에는 각각의 소나타 앞에

마치 당시를 재현하듯

라틴어 텍스트를 낭송한다.

만약 시대악기 연주가 낯설다면

리카르도 무티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라토리오(합창)버전은

역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의 조합.


11

기도와 묵상은 비단

종교인 만의 것은 아닐테다.

삶과 죽음의 문제,

곧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고뇌하는 모든 이에게

음악으로 드리는 기도와 묵상인

하이든의 “일곱 말씀”은 음악으로 행하는,

사유와 명상의 훌륭한 사례가 아닐까.


종교나 영적인 가르침이 그렇듯

훌륭한 예술작품 역시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물질주의와 세계의 혼탁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 허락된,

작지 않은 위안과도 같은 것이다.


12

마지막으로 연주 동영상은,

위에서 언급한 음반들보다 실연 동영상을

2가지 링크한다.


첫번째는 키아라 현악4중주단의 연주.

무대의 조명이나 각 소타나 앞의

영어 텍스트 낭송을 통해

하이든이 묘사한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쯤 느껴볼 수 있겠다.

참고로 제2바이올린을 맡은 사람은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윤혜영씨라고 한다.

(영어로는 혜영 줄리 윤이다.)

https://youtu.be/R2ljYXsWWGs


두번째 동영상은

게리트 치터바르트라는

포르테피아노 연주자가 올린 영상.

연주 자체도 나쁘지 않고,

시대악기의 연주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https://youtu.be/2BOqWk_By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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