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 리스트 ⟨사랑의 꿈⟩, ⟨내 사랑은 붉디붉은 장미와 같아⟩
§ § §
첫 음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다.
높은 레(D)에서 시작해
시들어 고개 숙이는 꽃잎처럼,
가만히 내쉬는 한숨처럼
미(E)까지 하행하는 피아노.
이윽고 셋째 마디에서
한 옥타브 위의 미로 도약하고
약박에서 비로소 홀연히,
고요하게 울려 나오는 목소리.
슈만의 ⟨나의 장미(Meine Rose)⟩.
작품번호 90으로 1850년 출판된
⟪6개의 노래와 레퀴엠⟫ 가운데
두 번째 곡이다.
원래는 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가
부르게끔 출판되었지만,
나는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의
따뜻하지만 쓸쓸한,
고요한 읊조림 같은 목소리를
사랑한다.
니콜라우스 레나우가 쓴
2연으로 된 시의 내용을
“옥스퍼드 송 페스티벌” 사이트의
독일어 원문과 영역을 참고해
대략의 내용만 간추리자면,
봄날 마치 보석과도 같던 장미,
그 기쁨은 이제
태양의 열기 속에 시들어
고개를 떨구고 빛깔을 잃어,
깊고 깊은, 어두운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한 바가지 물을 주네.
내 마음의 장미,
사랑하는 이는
병상의 고통으로 시들어
고개를 숙인 채 창백해져,
다시 회복하기 어려움을 알지만
꽃에게 물을 준 것처럼
그대 발치에 내 영혼을 바치네.
...... 정도가 되겠지만,
독일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시로 옮길 만한 문장력도 없으니
당연히 온전한 번역은 아니다.
시 전문과 영역은
위에 언급한 사이트를 참고하시길.
1850년에 작곡된 이 가곡집에
의아하게도 ‘레퀴엠’이 들어간 것은,
슈만이 작품집을 완성할 무렵,
레나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추가한 것이라고,
또 실제로는 레나우가 위독했지만
사망한 것은 며칠 뒤였다고 전해진다.
(Liederabend.cat참고)
시는 장미의,
그리고 장미로 상징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리고 있고,
슈만은 그 시인의 ‘죽음’까지
다루고자 하였으니
(더구나 레나우는 정신질환으로
몇 년 뒤의 슈만처럼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듣다 보면 코끝이 아릿해지는,
가슴 먹먹한 노래다.
장미는 대체로 사랑과 정열,
젊음과 화려함의 상징이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정반대의 것들,
이를테면 죽음의 불가피함과
남겨진 자의 쓸쓸함을 의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Thomas Moore)가 쓴 시
⟨여름날 마지막 장미
(The Last Rose of Summer)⟩에
이전부터 전해져 오던
⟨Aisling an Óigfhear(젊은이의 꿈)⟩의
선율이 붙어 만들어진 민요가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는 것도,
비슷한 까닭에서 이겠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부고가 부모상이 아니라
본인상으로 전해지는 것,
그렇게 연락처의 목록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드는 것.
사랑하는 이들 하나둘 먼저 떠나보내고
여름의 끝무렵 마지막 남은
한 떨기 장미처럼 우두커니 홀로,
훗날 베토벤과 멘델스존, 플로토우와
같은 수많은 작곡가들이 인용할 만큼
널리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그렇게 쓸쓸하지만 담담하게
아직은 살아있는 자의
서글픈 심정을 담아낸다.
머지않아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가리라는 것을,
소중한 이들이 사라진 이곳의 황량함을
버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슈만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를 번역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기에,
영시 전문은 링크로 대신한다.
레나우와 무어에게는 장미였다면,
시인 김지하에게는 목련이었다.
김광석이 4집에서 부른 ⟨회귀⟩.
(황난주 작곡)
그야말로 절창(絶唱),
절창(絶唱)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러나 이제 시를 지은 이도,
노래를 부른 사람도 가고 없으니,
마치 15세기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çois Villon)이
대한 발라드⟩에서 한탄했듯이,
Mais où sont les neiges d’antan!
(지난날의 눈은 다 어디로 갔는가!)
흰 눈도, 하얀 목련도 그렇게 흰 빛만,
‘짧은 눈부심’과 ‘긴 기다림’만 남기고
하얀빛만, 하늘로 오른다.
어제의, 엊그제의 눈은,
목련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비용의 시구는 훗날 관용구처럼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슈만의 ⟨나의 장미⟩가 발표된 1850년에,
리스트는 3곡으로 된 피아노 작품집
⟪사랑의 꿈⟫, S.541을 출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3번은,
원래는 1843년에 작곡된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
⟨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S.298.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 이전에 올린 글
막스 리히터: Maria, the Poet(1913)에서
러시아 시인 츠베타예바가 썼듯이
우리는 나약하고 위태로운,
늘 이별과 죽음 앞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살아있는 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에서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는,
“사랑은 붉디붉은 장미와도 같”은
것이라고 쓴다.
이 노래 역시 ⟨여름날 마지막 장미⟩처럼
이전부터 전해져 오던 민요
⟨Low Down in the Broom⟩의 곡조를
차용한 버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바다가 말라붙어 사라질 때까지,
바위가 햇빛에 녹아 내릴 때까지
(Till a’the seas gang dry, my dear
And the rocks melt with’ the sun),
내 삶의 모래시계가 다하더라도
(While the sands o’ life shall run),
수만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라도
(Tho’ it were ten thousand mile),
그렇게 살아있는 한,
사랑할 수 있는 한,
그대를 사랑하겠노라고,
그대 발치에 내 영혼을 바치노라고,
아직은 살아있는 자가 부르는,
장미의 선연한 빛과도 같은
노래들.
오, 나의 장미! 사랑하는 나의
여름날 마지막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