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탁구 치면서 이야기 진짜 많이 하거든요"
우리는 말로 서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간'을 통해 서로를 만난다.
- 마틴 부버 (철학자 겸 교육자)
오늘의 대학원 학업 보고는
이 '거리'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주부터 서사적 코칭 수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의 서사를 소개하는
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종목을 사랑하게 된 이유와 의미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요.
이번 발표에선 '탁구'를 5년 동안 쳐오신 한 선생님께서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대인 거리'이론을 곁들여 소개해 주신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 이론은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관계의 상관성을 분석한 이론인데요.
홀에 따르면,
인간은 공간(space)을 통해 관계를 표현하고 조절하며
사람들이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지하려는 거리가 총 4개로 나뉜다고 설명했습니다.
친밀한 거리 (0~45cm 이내)
: 포옹이나 속삭임, 애정 표현이 가능한 거리.
깊은 신뢰, 보호감, 정적 유대가 있는 관계에서만 허용됨.
만약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이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즉각 불편함을 느끼거나 방어적이 됨.
2. 개인적 거리 (45cm - 1.2m 이내)
: 친구, 친한 동료와 대화할 때 유지하는 거리로써
표정이나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읽을 수 있는 범위
3. 사회적 거리 (1.2m ~ 3.5m)
: 업무상의 대화, 공식적인 상황, 처음 만난 사람과의 상호작용 등
적절한 예의와 안정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구간.
4. 공적 거리
: 강의, 발표, 연설처럼 청중과 연사가 관계를 맺는 거리이거나
공식적이고 비대면성이 높은 거리감.
발제를 맡은 선생님께서는
탁구대의 전체 길이가 2.79m인데
이는 '사회적 거리'에 해당되며
탁구의 매력이 '소통'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교수님 역시 한 마디 하셨습니다.
"우리 탁구 칠 때 보면, 진짜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대인 거리 이론을 통해 '탁구'라는 스포츠를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또 생활체육으로써의 인기 요인도 알 수 있었던
재밌는 발표였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
대인 거리 이론을 좀 더 찾아보다가
철학자 마틴 부버의 책
<나와 너>에서 언급한
거리와 관계에 대한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부버는 인간의 모든 관계는
두 가지라고 합니다.
'나와 너(thou)'
그리고 '나와 그것(it)'
*thou는 중세 영어에서 자주 썼던 'you'라는 의미입니다.
셰익스피어 글에서 자주 볼 수 있고 약간 자네/당신 뉘앙스예요.
'나와 너'는 상대를 '존재로서'만나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가장 깊은 형태입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수단 혹은 대상으로 보는 만남입니다.
필요할 때 연락하고, 목적이 있을 때 만나고, 일이 끝나면 사라지는 관계.
다시 말해
꼭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을 하는 사람은 '나와 그것'
'일'이 없어도 안부가 궁금하거나
잘 지내고 있나 싶어 연락을 하고 싶은 사람은 '나와 너'입니다.
새삼스럽게
날씨가 좋아서 떠오르는 가족과 친구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를 건 친구
좋은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연락을 준 친구가 떠오르며
저에게 '대상'이 아닌 '존재'로서의
사람들이 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더니
가족과 또 가깝게 지내는 친구 몇몇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관심 있는 타인들이
뭐 먹고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 많은데요.
나름 내향인이고 또 쑥스러움이 많아
생각하는 것만큼 막 먼저 연락하진 못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제가 'ㅇㅇ 보고 싶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라고 생각하면
얼마 안 가 그 사람과 연락이 닿게 되더라고요.
'나와 너'의 관계성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 분명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존재로서의 친구'가 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존재로서의 친구'를 단 한 명 이상이라도 갖는 것도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없어도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스포츠에서 시작해
관계에 대한 철학자의 말로 끝난
오묘한 글이지만, 늘 읽어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