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어언 11년이 지났다.
졸업하자마자 귀국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요령 없는 신입사원 시절의 정신없음과
삶이 고달프다는 핑계로
페이스북에도 드문드문 들어가게 되며
남의 근황보다는
내 생존에 급급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연락을 하거나
근황을 나누는 대만인 친구는 거의 없다.
유일하게 남은 친구
‘윈윈이’만 빼고.
윈윈이는 대학 동기다.
정확한 첫 만남은 기억나지 않지만
수업이 겹치고, 자리가 가까워지면서
한두 마디씩 말을 트고
밥을 같이 먹고 수업을 함께 듣고
취미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윈윈이는 고래를 참 좋아했다.
귀엽고 멋지다고 했다.
필수과목 수업에서는 자주 졸고 따분해했는데
해양생태계나 고래 수업 관련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윈윈이는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면 ‘뭘 먹어야 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미식 도시 타이페이에 살면서?
온갖 요리와 과일, 차와 밀크티가 넘쳐나는 도시이자
유학생들 대부분이 기본 5kg 찌워 가는 나라에서 말이다.
그러다 나중에 타이페이 외곽에 있는
윈윈이 집에 놀러 가고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퇴직하신 아버지가 굽는
담백하고 건강한 빵,
신선한 채소로
그때그때 볶아내는 어머니의 요리.
집에 오면
이미 이렇게 맛있는 게 많으니
타이페이가 미식도시라 한들
윈윈이에게는
정말 ‘먹을 게 없었던’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윈윈이의 조용하지만 분명한 주관과
편한 사람들 곁에서 터지는 큰 웃음은
부모님을 꼭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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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함께 피아노도 쳤다.
학교 연습실에서, 가끔은 윈윈이네 집에서
연탄곡을 치며 웃고,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다.
외지 생활 속에서
가족만큼 따뜻하게 대해준 친구를
졸업 후 8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났다.
보자마자 끌어안고 서로 펑펑 울었다.
너무 잘해준 친구였는데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이
미안해서.
친구의 부모님과도 영상통화를 하며
안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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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입학 서류 때문에
대만에 길게 머무르게 되어
주말에는 윈윈이네 집에서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졸업 후 지난 10년간
나는 한국에서 회사 일에 고군분투 했다면
윈윈이는 엄마이자 아내로
또 다른 전장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화가’가 되어 있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가며 생긴 시간을 쪼개
고래와 바다 풍경을 그리고,
홈페이지와 인스타를 만들고,
엽서와 양말, 키링을 만들고
온라인 주문을 포장해 보내거나 고
동네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고거나
근처 빵집의 계절 카드를 만들면서 보낸다고 한다.
작업 노트를 넘겨볼수록
이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윈윈, 애 키우면서 그림도 그리고 안 힘들어?”
“안 힘들어. 진짜 즐거워(好開心)
아들도 귀엽고, 그림 그릴 때는 행복하고.”
고래와 해양 생태계를 여전히 아끼는 그녀는
바닷가 근처에서
자기를 딸처럼 아껴주는 남편과
씩씩한 아들과 함께
치열하지만 마음이 열리는 즐거운 순간을
매일 살아가고 있었다.
“윈윈 진짜 멋지다. 진짜 행복해 보여.”
“너도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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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0년 만에 같이 피아노를 치고
(이제는 친구의 아들 ‘뽀뽀’와 함께)
바다에 가고, 서로 그림을 그려주며
서로의 ‘여전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고,
일상 속 역할을 다하며,
지금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자기답게 사는 사람이란
아마 이런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