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지, 라는 한 마디에 대하여

체념이 아니라 수용이 되는 순간

by Byline Unknown

버스가 떠난 아침


출근길에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가 문을 닫고 떠나는 걸 지켜봤다. 뛸 수도 없었다. 신호는 빨간불이었고, 차는 쏟아지고 있었고, 버스는 묵직하게 가속하며 멀어졌다. 다음 버스는 12분 뒤. 입에서 나온 말이 “그럴 수 있지”였다. 짜증이 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짜증을 낸다고 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말을 자주 쓴다. 프로젝트 일정이 뒤틀릴 때,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누군가 약속을 어길 때. “그럴 수 있지.” 세 글자와 조사 하나. 이 짧은 문장이 꽤 넓은 범위를 커버한다.



반응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사람에게는 무언가가 일어났을 때 즉각 반응하는 회로가 있다. 버스를 놓치면 짜증, 일정이 밀리면 불안, 기대가 어긋나면 실망. 이 회로는 빠르고 자동적이다. 문제는 빠른 만큼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사상을 요약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선택이 있다.” 정확히 프랭클이 쓴 문장은 아니라고 한다. 스티븐 코비가 프랭클의 철학을 떠올리며 정리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출처가 누구든 간에, 이 문장이 가리키는 장소는 분명하다. 일이 터진 순간과 내가 움직이는 순간 사이에 있는 틈. “그럴 수 있지”는 그 틈에 사는 말이다.


즉각적인 반응은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감정이 먼저 도착한 결과다. “그럴 수 있지”는 그 감정이 도착한 뒤, 문을 열어주기 전에 잠깐 멈추는 동작에 가깝다.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



틀린 음 다음에 오는 음


1964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이 명백하게 틀린 코드를 쳤다. 솔로 중이던 마일스의 프레이징과 전혀 맞지 않는 화성이었다. 행콕은 순간 얼어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일스는 잠깐 멈추더니, 행콕이 친 코드를 맞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음을 불었다. 틀린 음을 지우는 대신, 그 음이 존재하는 세계를 새로 만든 거다.


마일스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재즈에 틀린 음은 없다. 잘못된 자리에 놓인 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럴 수 있지”의 정체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떠난 버스도, 틀린 코드도, 어긋난 일정도.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어떤 음을 연주하느냐다. “그럴 수 있지”는 틀린 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다음 음을 고를 여지를 만드는 말이다.


재즈 즉흥연주에서 실수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다. 악보대로 치는 음악에서 실수는 오류다. 하지만 즉흥연주에서 실수는 재료가 된다. 예상하지 못한 음이 끼어들면, 그 음을 중심으로 새로운 프레이징이 만들어진다. 실수를 실수로 남겨두느냐, 새로운 흐름의 시작점으로 쓰느냐. 그 갈림길에서 “그럴 수 있지”가 작동한다.



체념과 한 글자 차이


“그럴 수 있지”가 체념과 다른 지점이 있다. 체념은 문을 닫는다.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렇다, 바꿀 수 없다. 문장 끝에 마침표가 찍히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반면 “그럴 수 있지”는 문장 뒤에 쉼표가 있다.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어떻게 하지. 그럴 수 있지, 다음엔 1분 일찍 나오자. 그럴 수 있지, 일단 다음 버스를 기다리자.


에픽테토스가 말한 것도 비슷한 구조다. 세상의 일을 두 가지로 나누라고 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건, 바람의 방향에 화를 내는 것과 같다고. “그럴 수 있지”는 이 구분을 일상의 언어로 바꾼 버전 같다. 거창한 철학 없이, 습관처럼 쓰는 세 글자가 같은 역할을 한다.


수용전념치료라는 심리치료가 있다. 불쾌한 감정이나 생각을 억누르거나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 핵심 개념이 ‘심리적 유연성’인데, 풀어 쓰면 이렇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부러지지 않고 휘는 능력. “그럴 수 있지”는 그 휘는 동작의 소리 같다.



버스가 떠난 이후의 하루


12분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탔다. 회사에는 5분 늦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회의를 하고, 코드를 쓰고, 점심을 먹는 동안 아침의 그 12분은 하루 속에 녹아서 사라졌다. 오후쯤 되니까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이 떠올랐다. 카버의 인물들은 큰 사건을 겪지 않는다. 냉장고가 고장 나고, 이웃과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저녁 식사 자리가 어색해진다. 그 장면들을 카버는 설명하지 않는다.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냥 일어난 일을 일어난 대로 적는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삶의 질감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그것도 하나의 태도다.


“그럴 수 있지”도 그런 문장인 것 같다. 일어난 일에 의미를 붙이기 전에, 일어난 일 자체를 받아들이는 문장. 해석하기 전에 인정하는 문장. 이 순서가 바뀌면 사람은 꽤 쉽게 지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해석하려 들고, 이미 지나간 일을 계속 되씹으면서.


퇴근길, 아침에 버스를 놓친 그 정류장을 다시 지나갔다. 같은 번호의 버스가 사람을 태우고 떠나는 게 보였다. 아침에는 저 버스가 전부인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그냥 하루에 수십 번 오가는 버스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그 순간에는 전부인 것 같지만, 하루가 지나면 수십 대의 버스 중 한 대가 된다. 그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그럴 수 있지”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