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걸 알아채는 감각에 대하여

직업이 바뀔 때마다 계절을 감지하는 채널도 달라졌다.

by Byline Unknown


꽃집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


오늘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건물 옆 화단에서 산수유가 피어 있었다. 아직 가지 끝에 몇 송이뿐이었는데, 걸음이 멈췄다. 꽃을 다루는 일을 그만둔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순간이 온다. 꽃집 앞을 지나칠 때 무의식적으로 양동이 속 꽃의 상태를 확인하는 버릇도 여전하다. 줄기가 물을 잘 먹고 있는지, 꽃잎이 마르기 시작했는지. 직업은 바뀌었는데 눈은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느낌.


봄이 온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채던 때가 플로리스트 시절이었다. 매주 새벽 양재 꽃시장에서 꽃을 사올 때,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았다. 2월 말이면 들어오는 꽃의 종류가 달라지고, 줄기에서 나는 풀 냄새의 농도가 진해진다. 시장 바닥에 쏟아진 꽃들이 튤립에서 프리지아로 바뀌는 어느 새벽, 아 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업이 바뀌면 계절을 감지하는 채널도 바뀐다


편집디자이너로 일할 때의 봄은 달랐다. 계절은 지면 위에서 왔다. 3월호 잡지의 색감이 겨울호보다 반 톤 밝아지고, 레이아웃에 여백이 조금 더 넓게 잡힌다. 촬영 로케이션에 자연광이 부드러워지는 시기라 사진의 온도도 달라졌다. 봄을 꽃이 아니라 CMYK 값의 변화로 감지하던 시절.


광고대행사에서 콘텐츠를 쓸 때는 또 달랐다. 봄은 기획안에서 먼저 왔다. "봄맞이 캠페인"이라는 단어가 회의실에 등장하는 순간이 내 봄의 시작이었다. 계절은 캘린더의 D-day이고, 콘텐츠 발행일로부터 역산한 타임라인이었다. 꽃 대신 기획서가 계절을 알려주던 시기.


개발자가 된 후에는 계절 감각이 더 흐릿해졌다. 모니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봄이 와도 한동안 모를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빌딩을 나서고 — 공기가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 아, 벌써 이런 계절이었구나 하고 알아챈 적이 있다. 직업이 실내로 깊이 들어올수록 계절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조지아 오키프는 "아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보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라고 했다. 그래서 꽃을 캔버스 가득 크게 그렸다. 바쁜 뉴요커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꽃을 보게 만들기 위해서. 직업을 옮겨 다니면서 알게 된 건, 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라 무엇을 볼 것인지가 달라진다는 거다. 꽃을 다루면 꽃이 보이고, 지면을 다루면 지면이 보이고, 코드를 다루면 코드가 보인다. 보이는 것이 달라지면, 계절이 도착하는 경로도 달라진다.



관찰의 언어


로버트 맥팔레인이 영국 각지를 돌며 수집한 것이 있다. 농부는 흙의 상태를 부르는 단어를 수십 개 알고, 어부는 바람의 종류를 부르는 단어를 수십 개 안다는 거다. 직업이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가 관찰을 더 정밀하게 만든다고. 『랜드마크』라는 책에 담긴 이야기인데, 이걸 읽으면서 내 경험이 떠올랐다.


플로리스트였을 때, 나도 꽃의 상태를 부르는 말이 있었다. "물이 올랐다"는 줄기가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상태, "목이 꺾였다"는 수분 부족으로 꽃머리가 축 처진 상태. 이런 말들은 직업을 떠나면서 쓸 곳이 없어졌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니다. 지금도 꽃을 보면 그 단어들이 먼저 떠오른다. 물이 올랐는지, 목이 꺾이려 하는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눈은 여전히 그 언어로 읽는다.


편집디자이너일 때는 "숨이 막힌다"는 말을 썼다.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 여백이 부족하면 지면이 숨을 못 쉰다고 했다. 개발자가 된 지금은 "결합도가 높다"는 말을 쓴다. 모듈 사이의 의존성이 너무 강하면 하나를 고칠 때 전부 흔들린다는 뜻인데 — 생각해보면, "숨이 막힌다"와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분과 부분 사이에 적정한 간격이 없으면 전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직업이 바뀔 때마다 언어가 바뀌었지만, 관찰하는 대상의 구조는 비슷했다.



남아 있는 감각


요즘 봄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퇴근길 공기다. 코끝에 닿는 공기의 질감이 어느 날부터 다르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약간 축축하면서 풀 냄새가 섞인 공기. 그 순간만큼은 프로젝트도 코드도 잊고, 그냥 숨을 쉰다.


올리버 색스가 "지각은 순전히 현재에 있지 않다, 과거의 경험을 끌어와야 한다"고 했는데, 아마 그 말이 맞을 거다. 지금 내가 봄 공기에서 느끼는 것에는, 새벽 화훼시장 바닥에서 맡던 풀 냄새와, 꽃다발을 묶을 때 손에 묻던 수액과, 가위로 줄기를 자를 때 퍼지던 초록의 비릿함이 겹쳐 있을 거다.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아채는 감각은, 결국 자기가 지나온 시간이 쌓인 것 같다. 같은 봄바람이 불어도 누군가는 꽃의 품종을 읽고, 누군가는 캠페인 론칭일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그냥 코트를 벗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감각이 더 낫다는 게 아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꽃을 다뤄본 손의 봄은 그렇지 않은 손의 봄과 조금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차이는 꽤 오래 남는다는 것.


오늘 본 산수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노란 점이었을 거다. 나에게는 3월 중순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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