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다

장르 없이 동작하는 취향의 결, 음악과 기억이 겹치는 순간.

by Byline Unknown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의 망설임


출근길에 스포티파이를 열었다. 유튜브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출퇴근길 음악은 유튜브 알고리즘에 맡기는 게 습관이 됐는데, 오늘은 왠지 내가 직접 골라둔 목록이 듣고 싶었다. 라이브러리를 스크롤하다가 오래된 플레이리스트 하나를 발견했다. 마지막 재생이 1년도 넘은. 썸네일도 기억나지 않는 목록이었는데, 곡 리스트를 훑는 순간 손이 멈췄다. Electric Light Orchestra, Bill Evans, The Ting Tings, Erik Satie. 이걸 한 목록에 넣어둔 사람이 나라는 게 잠깐 낯설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Last Train To London’의 인트로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왔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곡이 아니라 그 곡을 듣던 시간이 먼저 돌아온 거다.



곡은 그대로인데 듣는 귀가 다르다


더럼 대학의 음악심리학자 Kelly Jakubowski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자전적 기억은 하루에 평균 한 번 정도 찾아오고, 그중 65%는 의도하지 않은 채 떠오른다고 한다. 특히 출퇴근이나 집안일처럼 주의를 많이 쓰지 않는 활동 중에 자주 발생한다고. 그러니까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ELO를 듣는 동안 갑자기 2년 전 야근 후 택시 안이 떠오른 건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셈이다.


그런데 기억이 돌아온 것보다 더 흥미로운 건, 같은 곡이 다르게 들린다는 거였다. The Alan Parsons Project의 ‘Eye In The Sky’는 예전에 그냥 멋진 신스팝이었다. 지금은 보컬 아래 깔리는 베이스라인이 먼저 들린다. Cream의 ‘Steppin’ Out’도 마찬가지. 예전엔 기타 리프에만 귀가 갔는데, 지금은 잭 브루스의 베이스 위로 진저 베이커의 하이햇이 어떻게 엇박으로 걸리는지가 들린다. 곡은 1초도 바뀌지 않았는데, 듣는 귀의 해상도가 달라져 있었다.


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여는 건, 그래서 단순한 재생이 아닌 것 같다. 예전의 내가 좋아한다고 표시해둔 것들을, 지금의 귀로 다시 듣는 일. 거기서 벌어지는 어긋남과 겹침이 꽤 정직하게 시간의 두께를 보여준다.



장르라는 칸막이가 없는 목록


이 플레이리스트에는 장르가 없다. 70년대 올드팝 옆에 빌 에반스의 재즈 트리오가 있고, 그 옆에 후쿠이 료의 피아노가 있고, 그 다음에 The Ting Tings의 인디팝이 나온다. 누군가 이 목록을 보면 어떤 기준으로 고른 건지 물을 거다. 솔직히 나도 설명하기 어렵다.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을 의미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경계했다. 그보다는 감각 자체로 경험하라고 했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과격하게 들리지만 결국은 이런 뜻 아닐까. 분류하지 말고 느껴라. 장르를 읽지 말고 질감을 들어라.


이 플레이리스트가 그렇게 작동하는 것 같다. ELO의 ‘Last Train To London’과 Erik Satie의 ‘Gnossienne No.1’은 장르로 보면 접점이 없다. 한쪽은 디스코 비트 위에 올라탄 신스팝이고, 한쪽은 박자표도 마디선도 없는 19세기 피아노곡이다. 그런데 둘 다 어떤 공간감을 가지고 있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공기가 있다는 느낌. 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 남겨두는 방식. 장르의 문법은 완전히 다른데, 내 귀에 도착하는 온도가 비슷하다.


후쿠이 료의 ‘Scenery’를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삿포로의 재즈 피아니스트. 1976년에 녹음된 이 앨범은 빌 에반스의 영향이 분명히 들리는데, 동시에 빌 에반스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교 너머로 북쪽 도시의 공기 같은 게 스며들어 있다. 목록 안에서 빌 에반스의 ‘You Must Believe In Spring’ 바로 다음에 후쿠이 료의 ‘Scenery’가 있는 건, 장르가 아니라 그 공기의 결이 비슷했기 때문일 거다.



알고리즘은 모르는 것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최근에 뭘 들었는지를 안다. 비슷한 곡을 이어서 틀어준다. 편리하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D’Sound의 ‘Enjoy’ 다음에 나카시마 미카의 ‘Memory’를 넣지 않는다. 노르웨이 재즈팝과 일본 발라드를 잇는 맥락을 계산할 수 없으니까. 나도 왜 이 둘이 나란히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이 순서로 듣는 게 좋았다는 것. 그게 전부다.


취향이라는 건 아마 그런 거다. 설명할 수 없지만 반복하게 되는 선택. 카테고리가 아니라 질감으로 작동하는 감각. Blu-Swing의 ‘Sunset’이 주는 느슨한 그루브와 Erik Satie의 ‘Gnossienne No.1’이 주는 정지한 듯한 부유감 사이에는 논리적 연결이 없다. 있는 건 그 두 곡을 나란히 좋아한 사람의 귀뿐이다. 그 귀가 곧 취향이고, 그 취향이 곧 그 시절의 나다.



다시 눌러본 재생 버튼이 알려준 것


퇴근길에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한 번 더 틀었다. 아침과는 다른 게 들렸다. 아침에는 기억이 먼저 왔는데, 저녁에는 곡 자체가 들렸다. 같은 날, 같은 목록, 같은 이어폰인데. 음악은 그런 식으로 매번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1년 넘게 방치한 플레이리스트는, 잊고 있던 서랍을 여는 것과 비슷하다. 안에 든 것들은 그대로인데, 꺼내 보는 손이 달라져 있다. 그리고 그 차이가 — 1년 사이에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지 않았는지, 어떤 소리에 더 예민해졌고 어떤 소리를 흘려보내게 됐는지 — 나를 꽤 정확하게 비춘다.

장르가 없는 플레이리스트가 나에 대해 말해주는 건 결국 이런 거다. 취향은 분류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때로는 이력서보다 정직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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