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와닿는다.
주말 오후에 『먼 북소리』를 다시 꺼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아마 10년 전쯤이다. 스피커에서 스탄 겟츠의 색소폰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키가 그리스 섬에서 아침을 먹는 장면을 읽는데, 겟츠의 보사노바가 지중해의 햇살처럼 글 위에 내려앉았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재즈를 틀어놓고 읽을 때 호흡이 달라진다. 아마 글을 쓴 사람이 재즈를 듣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문장의 리듬에 스윙이 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하루키는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이 에세이를 썼다. 같은 시기에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완성했다. 소설을 쓰는 시간과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 나란히 있었다는 건, 두 글쓰기가 서로 다른 근육을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과거형이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진 게 아니라, 에세이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왜 그런지 생각해봤다.
소설 속 하루키는 주인공에 빙의한 상태다. 29세에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화자는 20대 후반이고, 60대에 쓴 『기사단장 죽이기』의 화자는 30대 중반이다. 자기 나이와 주인공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다. 본인의 경험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 피터캣 재즈바의 기억이 레코드 가게 직원으로 변주되고, 아내와의 일화가 소설 속 연인 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 결국 소설의 ‘나’는 하루키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하루키를 닮았지만 하루키는 아닌 누군가.
에세이의 ‘나’는 다르다. 『먼 북소리』에서 로마의 추운 겨울에 투덜대는 하루키, 그리스 섬에서 고양이와 지내는 하루키, 이탈리아 우체국의 비효율에 짜증내는 하루키. 그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이다. 각색되지 않은 목소리. 소설의 ‘나’가 작곡된 멜로디라면, 에세이의 ‘나’는 즉흥연주에 가깝다. 악보 없이 그 순간의 감각으로 치는 연주.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이렇게 말했다.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에게서 찾지 말라. 저자가 죽어야 독자가 태어난다. 글을 쓴 사람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읽는 사람이 텍스트 안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글읽기의 본질이라고.
소설을 읽을 때는 바르트의 말이 작동한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무슨 의도로 이 장면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와타나베 도루의 감정이 내 감정과 겹치는 순간이 중요하다. 저자는 뒤로 물러나고,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런데 에세이는 반대다. 에세이를 읽을 때는 저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 『먼 북소리』를 읽는 이유는 그리스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루키라는 사람이 그리스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그 사람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에세이에서 저자가 죽으면 글도 같이 죽는다. 남는 건 정보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보다 에세이가 좋아진 건, 아마 이야기보다 사람이 궁금해졌기 때문일 거다. 잘 지어낸 세계보다, 한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가 궁금해졌다.
하루키는 1974년부터 고쿠분지에서 피터캣이라는 재즈바를 운영했다. 낮에는 가게를 열고, 밤에는 글을 썼다. 7년 동안. 스탄 겟츠와 게리 멀리건을 좋아한다고 1975년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는데, 이 취향이 에세이 문장에 그대로 묻어 있다.
빌 에반스의 연주를 들으면 기교보다 먼저 느껴지는 게 있다. 건반을 누르는 사람의 내면이 소리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감각. 1961년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라이브 녹음을 들으면, 클럽의 공기와 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에반스의 호흡이 들린다.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걸러지는 것들이 라이브에서는 고스란히 남는다. 소설이 스튜디오 녹음이라면, 에세이는 라이브 연주다. 편집되지 않은 호흡, 실수까지 포함한 현장의 공기.
하루키의 에세이를 재즈와 함께 읽으면 생동감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니까. 연주자 자신이 소리 안에 들어 있는 음악, 쓰는 사람 자신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글. 매개 없이 사람이 전달되는 형식.
10년 전에 읽었을 때는 그리스 섬의 풍경이 좋았다. 올리브나무, 에게해, 하얀 벽. 여행지의 이미지가 먼저 왔다. 지금 다시 읽으니 풍경보다 문장 사이에 있는 사람이 보인다. 이탈리아 우체국에서 30분을 기다리다 짜증내는 하루키, 그리스 섬의 조용한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소설의 다음 장면을 떠올리는 하루키. 풍경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사람이 전경으로 나왔다.
같은 책인데 읽히는 층위가 달라졌다. 아마 나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20대에는 이야기가 필요했고, 30대인 지금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궁금하다. 소설이 “무엇을”에 대한 글이라면, 에세이는 “누가”에 대한 글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여전히 좋은 소설인 건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요즘은 소설 옆에 놓인 에세이 쪽으로 손이 먼저 간다. 거기에 하루키가 있으니까.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재즈가 흐르고 있고, 책은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천천히 읽을 생각이다. 에세이는 속도가 아니라 밀도로 읽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