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을 읽은 사람이 쓰기 시작할 때

드래곤라자부터 웹소설까지 수십 년을 판타지 독자로 살았다.

by Byline Unknown


북마크가 1,200개쯤 쌓였을 때


네이버 시리즈 북마크 목록을 스크롤하다가 멈췄다. 1,200개가 넘는다. 완결까지 읽은 작품, 중간에 놓은 작품, 매일 연재를 기다리는 작품이 뒤섞여 있다. 웹소설과 웹툰을 합치면 숫자는 더 올라간다. 이걸 다 읽었다는 사실보다, 이걸 읽는 동안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빈 문서를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한 줄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웠다. 1,200개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의 첫 문장치고는 형편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편없는 한 줄이, 1,200개를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을 줬다.



하이텔 시절의 활자들


시작은 이영도였다. 초등학생 때 『드래곤 라자』를 읽었다. 1998년이었나. PC통신 하이텔에서 연재되던 소설이 책으로 나왔고, 표지를 보자마자 용돈을 탈탈 털었다. 이영도의 문장은 그때까지 읽어본 판타지와 결이 달랐다. 칼이 부딪히는 소리보다 인물의 생각이 먼저 왔다. 전투 장면에서 철학이 튀어나왔다. 판타지 소설에 문장력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뒤로 『가즈나이트』, 『묵향』을 거쳐 장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무협에 빠져 『비뢰도』와 『천잠비룡포』를 밤새 읽었고, 웹소설 플랫폼이 생기면서부터는 읽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회귀물, 환생물, 시스템물, 아카데미물. 장르가 세분화될수록 나의 독서 반경도 넓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장르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해졌다.



같은 선반 위의 이름들


음악을 들을 때 장르를 따지지 않는다. 좋은 곡이면 듣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라이트노벨이라서, 웹소설이라서 덜 진지한 문학이라는 시선이 있다. 오히려 좋지 않은가. 매주 수만 명이 기다리는 연재를 매일 써내는 사람들이다. 그 체력과 구성력을 가볍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궤도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있다. 귀여니의 소설을 읽고 흠을 잡으려 했다고 한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읽다 보니 감화됐다고. 나는 그 이야기가 좋았다. 편견을 갖고 펼친 책이 편견을 부수는 순간. 텍스트는 원래 그런 힘이 있다. 장르가 아니라 문장이, 카테고리가 아니라 이야기가 사람을 움직인다.


내 책장에는 칸막이가 없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옆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있고, 그 옆에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집이 꽂혀 있다. 같은 선반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있고, 전자책 메모리에는 싱숑, 한중월야, 유진성 같은 웹소설 작가들의 이야기가 수백 편 쌓여 있다. 나에게 이 이름들은 전부 같은 선상에 존재하는 작가들이다.


고전문학과 웹소설 사이에 벽을 세우는 건 사실 편견이라기보다, 지금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 가깝다. 지하철에서 웹소설을 읽을 때 화면을 살짝 기울이게 되는 그 순간. 그게 벽이다. 나는 그 벽을 세운 적이 없다. 19세기 파리의 하수도를 쓴 사람과, 어느 아침 벌레로 변한 남자를 쓴 사람과, 전지적 독자를 쓴 사람과, 매일 자정에 한 화씩 올리는 사람. 그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독자가 불만을 품는 순간


오래 읽다 보면 눈이 높아진다. 눈이 높아진다는 건 감탄의 횟수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야기의 분기점에서 내 머릿속에 다른 경로가 그려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주인공이 각성하는 타이밍이 너무 이르다고 느꼈다. 조연으로 등장한 검사가 서사 없이 퇴장할 때 아까웠다. 세계관 설정은 촘촘한데 그 설정이 후반부에서 회수되지 않는 작품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서 내가 다시 짜는 전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읽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고치고 있었다.


토니 모리슨이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읽고 싶은 책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써야 한다." 1981년 오하이오에서 한 연설이었다고 한다. 그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작가들의 세계에나 해당하는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200개의 북마크를 쌓고 난 뒤에 다시 읽으니 뉘앙스가 달라졌다. 멋진 말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이었다.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도 쓰지 않았으니까.



여권이 발급되는 방식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썼다. 읽기는 작가의 나라에 입국할 때 필요한 여권 같은 것이라고. 많이 읽은 사람은 서류가 갖춰진 상태로 그 나라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십 년을 읽었으니, 나는 꽤 두꺼운 여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고전문학 도장, 판타지 도장, 무협 도장, 웹소설 도장이 빼곡하게 찍힌. 문제는 여권이 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쓰기 시작하니 읽기와 쓰기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읽을 때는 자연스러워 보이던 장면 전환이, 쓸 때는 몇 시간을 붙잡아도 어색했다. 머릿속에서는 시네마틱하게 펼쳐지는 전투 장면이, 문장으로 옮기면 설명문이 됐다. 캐릭터의 감정선을 그려놓고도 대사 한 줄이 안 나왔다. 읽기가 가르쳐준 건 좋은 이야기의 윤곽이었지, 그 윤곽을 직접 그리는 손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막히는 장면에서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예전에 읽은 어떤 작품의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작가가 비슷한 상황을 어떻게 풀었는지가 기억 저편에서 건너온다.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다. 디킨스에게서 배운 인물 묘사가, 하루키에게서 흡수한 리듬이, 이영도에게서 익힌 대화의 결이, 이름 모를 웹소설 작가에게서 체득한 전개의 속도가 — 장르의 칸막이 없이 쌓인 것들이 퇴적층처럼 바닥에 깔려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위로 올라온다.



커서가 깜빡이는 자리


요즘 퇴근 후의 루틴이 바뀌었다. 웹소설 앱을 여는 대신 워드 파일을 연다. 프롤로그를 세 번 갈아엎었고, 주인공의 이름을 다섯 번 바꿨다. 세계관 설정을 설계하다가 밤을 새운 적도 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게 합리적인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수십 년간 남의 세계에서 살았다. 이영도의 세계, 하루키의 세계, 디킨스의 세계, 수많은 웹소설 작가들의 세계. 장르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세계들 사이에 벽을 세운 적은 없다. 전부 좋았고, 전부 내 안에 남았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어온 사람이, 이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편견 없이 이야기를 읽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다. 아직은 서투르다. 그래도 이 자리가, 지금까지 앉아본 자리 중에 가장 정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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