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째인지 모르는 허니와 클로버

허니와 클로버를 다시 보는 일은 곧 지금의 나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by Byline Unknown

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 몇 번 봤는지 세어본 적은 없다. 다만 '청춘에너지'가 바닥났다고 느낄 때마다 틀었으니까, 적어도 열 번은 될 거다. 허니와 클로버. 우미노 치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2005년 애니메이션.


재생을 누르면 스가 시카오의 목소리가 먼저 온다. 오프닝이 시작되는 몇 초 — 그 짧은 인트로만으로 어떤 온도가 돌아온다.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콩브레의 기억 전체가 되살아났다고 썼는데, 나에게는 그 오프닝이 마들렌이다. 곡이 흐르는 순간 작품의 줄거리보다 먼저, 이걸 처음 봤던 원룸의 공기가, 휴가를 나와 방에서 노트북을 펼쳤던 때의 형광등 불빛이, 서른 넘어 퇴근 후 소파에 누워 틀었던 밤이 겹쳐서 온다.


영화도 책도 대부분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편인데, 이 작품만은 몇 년째 습관처럼 다시 찾게 된다. 이유를 말로 정리하기 어렵다. 다만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는 건 안다.



방향이 없던 시절의 타케모토


스무 살 즈음, 처음 봤을 때는 타케모토 유타에게 빠졌다. 미대에 다니지만 뚜렷한 재능도 방향도 없는 인물. 주변에는 하구미처럼 처음부터 선택받은 동기가 있고, 모리타처럼 재능과 파괴력을 동시에 휘두르는 선배가 있는데, 타케모토는 그 사이에서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졸업이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불안. 당시의 나도 그랬다. 전공도 확신이 없었고, 잘하는 게 뭔지도 몰랐다.


타케모토가 자전거로 일본 종단 여행을 떠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 정하지 않은 채 페달을 밟는 장면. 체력이 바닥나 쓰러지고, 낯선 동네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시 페달을 밟는다. 목적지가 아니라 페달을 밟는 행위 자체가 그의 대답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울었다. 감동이라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무 방향이나 일단 밟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



한 방향만 보던 마야마


군대를 다녀오고 스물다섯 즈음 다시 봤을 때, 눈이 간 건 마야마 타쿠미였다. 마야마는 졸업한 선배 리카를 좋아한다. 리카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마야마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마야마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야마다가 옆에서 아파하든, 리카 곁에 있으려고 한다.


스무 살 때는 그게 안 보였다. 타케모토의 방황에만 눈이 갔으니까. 그런데 스물다섯에는 마야마의 고집이 이해됐다. 20대 중반이라는 시간에는 어떤 방향이든 정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이걸 계속해도 되는 건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 마야마가 리카를 향해 움직이는 건 연애라기보다 자기 확신에 가까웠다. 답이 오지 않는 방향을 그래도 유지하는 일. 무모하다기보다 절실하다고 느꼈다.



지켜보는 쪽의 자리


서른이 넘어 다시 봤을 때, 하나모토 슈지 교수에게 눈이 갔다. 하구미의 친척이자 미대 교수. 하구미의 재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면서, 그 재능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사람. 본인도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그쪽으로 가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스무 살 때 하나모토 교수는 배경이었다. 그냥 어른. 스물다섯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서른이 넘으니 이 사람이 보인다. 무대 위에서 뛰는 사람이 아니라 무대 옆에서 보는 사람. 자기 차례가 지나간 걸 아는 사람. 그런데 그게 쓸쓸하기만 한 게 아니다. 하나모토는 하구미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걸 보면서 자기 몫의 기쁨을 찾는다.


직장에서 후배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를 끝내고 좋아하는 걸 볼 때가 있다. 내가 직접 한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다. 그 감정의 정체를 오래 몰랐는데, 하나모토를 다시 보면서 알 것 같았다. 자기 시간을 한 바퀴 돌아온 사람만이 느끼는 종류의 기쁨. 지켜보는 자리에도 밀도가 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는 것 같다.



보는 눈이 눈금이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 사이의 관계는 결코 확정되지 않는다." 같은 그림 앞에 서도 스무 살의 눈과 서른의 눈은 다른 것을 본다. 그림이 변한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의 경험이, 맥락이, 몸에 쌓인 시간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도 같은 이야기다.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강물이 흘러간 것만이 아니라 들어가는 사람도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허니와 클로버라는 강에 나는 열 번 넘게 들어갔고, 매번 다른 물살을 만졌다.


소아과 의사 도널드 위니컷은 '전이 대상'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아이가 낡은 담요나 인형에 집착하는 건, 그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연결해주는 안정감 때문이라고. 이게 어른에게도 작동한다. 결혼반지, 책상 위의 사진, 반복해서 듣는 노래 — 불안과 안정 사이를 잇는 다리. 청춘에너지가 떨어질 때마다 허니와 클로버를 틀었던 건, 아마 이 작품이 나에게 그런 대상이기 때문일 거다. 작품 자체가 주는 위로라기보다, 이걸 보던 여러 시절의 내가 한꺼번에 돌아오는 감각. 스무 살의 기숙사도, 스물다섯의 원룸도, 서른의 소파도 전부 오프닝 곡 안에 접혀 있다. 그걸 펼쳐 보는 것만으로 바닥난 무언가가 다시 차오르는 방식.


작품이 거울이라면, 감정이입 대상은 거울에 비친 상이다. 타케모토가 보이던 시절의 나는 방향이 없었고, 마야마가 보이던 시절의 나는 하나의 방향을 붙잡고 있었고, 하나모토가 보이던 지금의 나는 — 누군가의 방향을 옆에서 보는 자리에 서 있는 거다.



다음번에는 누가 보일까


우미노 치카는 이 작품의 제목을 지을 때, 마침 옆에 놓여 있던 스피츠의 앨범 'ハチミツ(하치미츠)'와 스가 시카오의 앨범 'クローバー(쿠로바)'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손 닿는 데 있던 두 장의 CD에서 우연히 붙은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십 년 넘게 꺼내 드는 자(Ruler)가 됐다. 작가도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다음에 다시 본다면 모리타가 보일지도 모른다. 재능이 있으면서 그 재능을 어디에 쓸지 끝까지 결정하지 않는 사람. 아니면 야마다가 보일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을 안고도 매일 도자기를 굽는 사람.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다음번에 누가 보이든, 그건 그때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비추는 인물일 거라는 것. 다시 보기라는 건 결국 자기 측정이다. 작품은 눈금이 새겨진 자 같은 거고, 감정이입 대상이 바뀌는 건 내가 그 자의 다른 눈금에 서 있다는 뜻이다. 허니와 클로버는 내가 가장 오래 쓰고 있는 자다. 아마 앞으로도, 청춘에너지가 바닥날 때마다 꺼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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