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이 늘 좋은 말은 아니다

옳음과 유익함이 교차하는 지점

by 사월의일곱번째날

검사지 위의 나


MBTI를 처음 해본 건 20대 후반쯤이었다. 그때도 INTP가 나왔고, 십 년 넘게 뭘 해봐도 결과는 같다. 맹신하는 건 아니다. 혈액형 성격론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다만 설명을 읽다 보면 불편할 정도로 맞는 대목이 있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한 줄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실제로 그렇다. 회의에서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하는 데 3초가 걸리지 않는다. 칭찬도 직선이고, 거절도 직선이다.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직선을 택하는 버릇. 빠르고, 정확하고, 종종 날카롭다.



교토의 차


그런 내가 가장 대하기 어려운 부류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본에는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개념이 있다. 속마음과 겉으로 내보이는 말. 특히 교토에서는 이 간극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손님에게 "부부즈케(찻물에 말은 밥) 드시겠어요?"라고 묻는 건 차를 권하는 게 아니라 이제 돌아가라는 신호다. 말의 표면과 의도가 정반대를 가리키는 화법.


오래 전이라면 이런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지, 왜 포장을 하느냐고. 상대가 빙빙 돌려 말하면 그 포장지를 뜯는 것도 일이었고, 뜯고 나서 나오는 속내가 별것 아닐 때의 피로감은 꽤 컸다.


그런데 그리 길진 않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네 가지 말


어느 순간부터 말을 네 가지로 나누게 됐다.


첫째, 옳은 말이면서 동시에 유익한 말. 이건 이상적이다. 사실에 부합하고, 듣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누구나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하지만, 생각보다 이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순간은 드물다.


둘째, 옳은 말이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 팩트는 맞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상황, 타이밍,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네가 틀렸어"라는 문장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상대의 무너진 자리 위에 떨어지면 벽돌과 다를 바 없다.


셋째, 옳지 않은 말이지만 유익한 말.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듣는 사람을 일으킨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가 논리적으로 근거 없는 문장이라 해도, 그 말이 누군가의 밤을 버티게 한다면 그건 작동하는 문장이다.


넷째, 옳지 않으면서 유익하지도 않은 말. 거짓인 동시에 해롭다. 이건 논의할 것도 없다.


흥미로운 건 순서다. 가장 지양해야 할 것은 당연히 네 번째다. 그런데 그 다음은? 직설적인 사람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셋째가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옳지 않은 말은 곧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살아보니 둘째가 더 위험하다. 옳다는 확신이 말에 힘을 실어주고, 그 힘이 상대를 짓누른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기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는 대화에 네 가지 격률이 있다고 했다. 진실하게, 필요한 만큼, 관련 있게, 명료하게. 그런데 그라이스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격률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놓인 원칙이었다. 협력의 원칙. 대화란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진실만으로는 대화가 완성되지 않는다. 진실이 상대의 귀에 닿는 방식까지 설계해야 비로소 말이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의 문장은 쓰여진 것보다 지워진 것이 많다. 인물들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독자는 그 침묵 사이에서 이야기를 읽는다. 카버가 보여준 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기술"이었다.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 전달되는 것. 사실이 아닌데 진실인 것.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셋째 부류의 말 — 옳지 않지만 유익한 말 — 에 가까운 것 같다.



직선의 끝에서


여전히 나는 직선을 좋아한다. 에둘러 말하는 게 체질적으로 어렵고, 말의 포장지를 뜯는 수고를 상대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건, 내 직선이 늘 유익한 건 아니었다는 걸 안다는 점이다. 옳은 말을 했는데 상대의 얼굴이 굳는 걸 본 적이 있다. 팩트를 전달했을 뿐인데 관계에 금이 간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옳았다. 하지만 유익하지 않았다.


교토 사람들의 화법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겉과 속을 다르게 말하는 이유가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말이 상대에게 닿는 방식을 오래 고민해온 문화의 결이라면. 부부즈케를 권하는 문장이 직설보다 더 많은 것을 배려하고 있다면. 그건 거짓이 아니라 일종의 설계다.


요즘은 말하기 전에 한 박자 쉰다. 이 말이 맞느냐보다, 상대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를 먼저 본다. 그래봐야 서툴다. 직선으로 날아가던 말에 어설프게나마 완충제를 덧대는 정도. 포장이라고 하기엔 투박하고, 배려라고 하기엔 어색하다. 그래도 예전처럼 던지고 끝내지는 않는다. 그 어설픈 한 겹이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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