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폈는데 겨울옷을 입는 4월. 달력의 계절과 몸의 계절이 어긋날 때
아침에 현관문을 열었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종류의 비.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후리스를 입었다. 4월인데. 벚꽃은 며칠 전에 만개했고, 타임라인에는 분홍빛 사진이 넘쳐나는데, 내 몸은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다. 달력은 봄이라고 하고, 꽃도 봄이라고 하는데, 손끝이 차갑고 코끝이 시리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제철 과일이 맛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과일이 익기에 가장 알맞은 온도와 일조량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억지로 재촉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겨울에도 딸기를 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하우스 딸기와 노지 딸기의 당도가 다르다는 건 대부분 안다. 제철이란 결국, 사물이 자기 리듬대로 무르익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제철이 있을까. 스물다섯에 취직하고, 서른에 결혼하고, 서른다섯에 집을 산다. 사회가 정해둔 달력대로 살면 제철인 걸까. 그 달력과 내 몸의 시간이 맞지 않을 때 — 준비는 됐는데 자리가 없거나, 자리는 있는데 준비가 안 됐을 때 — 그건 제철이 아닌 걸까.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둘로 나눴다. 시계가 재는 시간과 몸이 겪는 시간. 그가 '지속(durée)'이라고 부른 건 후자다. 시계의 1분은 모두 같은 1분이지만, 몸의 1분은 그렇지 않다. 치과 의자에서의 한 시간과 좋아하는 사람과 커피향을 맡는 한 시간이 같을 리 없다. 같은 60분인데 밀도가 전혀 다르다.
계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달력의 4월과 몸의 4월이 다르다. 달력은 봄이라고 선언하는데 몸은 아직 움츠러들어 있다면, 둘 중 하나가 틀린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따지기보다, 그 어긋남 자체가 오히려 솔직한 상태일 수 있다.
삶의 타이밍도 비슷하다. 모두가 봄옷을 꺼냈는데 나만 겨울옷을 입고 있는 기분. 동기는 승진했는데 나는 아직 같은 자리인 기분. 주변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데 나만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고 있는 기분. 그런 순간마다 뒤처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어쩌면 단지 제철이 다른 것뿐인지도 모른다.
재즈에 싱코페이션이라는 게 있다. 강박이 올 자리에 약박을 놓고, 약박이 올 자리에 강박을 놓는 것. 정박대로만 치면 안정적이지만 밋밋하다. 엇박이 끼어들어야 긴장이 생기고,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에 듣는 사람의 몸이 움직인다. 흥미로운 건, 싱코페이션이 포함된 리듬을 사람들이 더 즐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거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보다, 살짝 어긋나는 쪽을 더 좋아한다는 것.
삶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 모든 게 제때 맞아떨어지는 인생은 안정적이겠지만, 돌아보면 의외로 단조롭다. 취직이 늦어진 시간 동안 읽은 책들. 이직 사이의 공백기에 손에 익힌 기술들. 계획에 없던 우회로에서 만난 사람들. 엇박이 만든 긴장 속에서 예상 못 한 것들이 자라났다. 정박대로만 살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것들이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후리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데, 길가의 벚꽃이 비를 맞으며 서 있다. 꽃잎 위에 물방울이 맺혀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몇 잎씩 떨어진다. 만개한 꽃과 차가운 비. 이것도 하나의 어긋남이다.
노자가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룬다"고 했을 때, 아마 이런 뜻이었을 거다. 제철은 달력이 정하는 게 아니라, 무르익으면 저절로 오는 것이라는. 4월에 겨울옷을 입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내 몸이 아직 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을 뿐이다. 준비가 되면 저절로 옷을 벗게 된다. 그때가 내 봄이다.
제철이 아닌 시간을 견디는 것. 달력 대신 자기 몸의 감각을 믿는 것. 그게 자기 리듬을 지키는 일의 전부인 것 같다. 누군가의 4월이 아직 겨울이라면, 그건 늦은 게 아니다. 아직 익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