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졸함과 품위에 대하여, 삶의 캐스팅에 대하여.
올해 초, 뉴스 하나가 타임라인을 뒤덮었다. 러닝화 브랜드 호카(HOKA)의 한국 총판 대표가 하청업체 직원들을 성수동 폐건물로 불러내 폭행한 사건이었다. 녹취록이 공개됐는데,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너 나 알아? 나에 대해서 뭐 아냐고." 야구 방망이와 무릎이 동원됐고, 피해자는 갈비뼈가 부러졌다. 조폭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실제 뉴스였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빨랐다. 미국 본사 데커스가 총판 계약을 해지했고, 대표는 사임했고, 러너들 사이에서 불매 움직임이 번졌다. "너 나 알아?"라고 물었던 사람을, 이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게 된 거다. 뉴스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스스로 그 배역을 골랐을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특정 유형의 인물이 패턴처럼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을 막는 관료, 뒷담화를 하는 동료, 약자에게만 목소리가 커지는 상사.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름이 없다. 자막에 "불량배 2"나 "직원 A"로 표기되는 부류. 서사에서의 기능은 딱 하나다. 주인공이 넘어야 할 작은 장애물. 드라마가 끝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E. M. 포스터는 1927년 케임브리지 강연에서 소설 속 인물을 '납작한 인물(flat character)'과 '둥근 인물(round character)'로 나눴다. 납작한 인물은 단 하나의 특질로 요약된다. 한 문장이면 충분한 사람. 반면 둥근 인물은 모순을 품고 있고, 예측을 벗어나며, 설득력 있게 놀라움을 준다. 포스터의 표현을 빌리면, 납작한 인물은 "인식하기 쉽고 기억하기도 쉽지만", 결코 깊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 총판 대표가 떠올랐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 "하청업체 직원을 폐건물로 불러내 때린 사람." 이 이상의 서술이 필요 없다. 납작하다.
궁금한 건 동기다. 치졸한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거나, 누가 봐도 본인 잘못인 상황에서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왜 스스로 그 배역을 택하는 걸까.
어빙 고프먼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책이 있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 1956년에 나온 책인데, 핵심은 간단하다. 우리는 매일 무대 위에 서 있고, 다른 사람 앞에서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 고프먼은 이걸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라고 불렀다. 무대 전면(front stage)에서 보여주는 자아와, 무대 뒤(back stage)에서의 자아가 다르다는 이야기.
흥미로운 건 이 프레임을 뒤집어볼 때 생긴다. 누군가가 치졸하게 구는 장면은, 고프먼의 언어로 보면 '인상 관리에 실패한'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게 그 사람이 선택한 인상 그 자체다. 자기보다 약한 상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논점을 흐리는 것 — 그건 의도된 연출이다. 문제는 그 연출이 본인 머릿속에서만 작동한다는 거다. 관객은 이미 그 사람을 '불량배 2'라는 배역으로 알고 있는데, 본인만 주연인 줄 안다.
반대편에는 다른 인물들이 있다. 영화에서든 실제 삶에서든, 이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조용하다. 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기 잘못이면 인정하고, 누군가를 깎아내려서 자기를 높이려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이런 사람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에세이 「살인의 단순한 기술」에서 쓴 문장이 있다. "비열한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 않은, 더럽혀지지도 않은,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챈들러는 탐정 소설의 주인공을 정의하면서 이 말을 했지만, 이건 결국 태도의 문제다. 거리가 비열하다고 해서 자기까지 비열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주변이 시끄럽다고 해서 자기도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
품위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그 단어가 좀 거창해서 다르게 말해보면 이렇다. 삶에서 자기 스크린 타임을 어떤 장면으로 채우느냐의 문제. 폐건물에서 하청 직원의 뺨을 때리는 장면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고, 같은 시간을 문제를 풀기 위해 테이블에 마주 앉는 장면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다. 카메라에 찍히는 시간은 같은데, 나중에 되감기할 때 남는 건 전혀 다른 인물이다.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에서 쓴 대사가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배우에 불과하다." 400년 전의 대사인데, 이걸 지금 다시 읽으면 약간 다르게 들린다. 모두가 배우라면, 배역은 누가 정하는 걸까. 감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캐스팅은 자기가 한다.
치졸함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 서사에서 자기를 삼류 엑스트라로 캐스팅한 셈이다. 한 컷이면 잊히는 역할. 이름 대신 기능만 남는 존재. 반면 소리를 높이는 대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잘못을 인정하고 방향을 바꾸는 사람, 비열한 거리에서도 비열해지지 않는 사람은 — 설령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오르지 않더라도 —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장면으로 남는다.
결국 매일 아침 선택하는 거다. 오늘 나는 어떤 장면을 찍을 것인가. 거래처와의 통화에서, 점심시간의 대화에서, 후배가 실수했을 때의 첫 마디에서. 카메라는 항상 돌아가고 있고, 감독은 자기 자신이다. "너 나 알아?"라고 묻는 순간, 그 사람의 엔딩 크레딧은 이미 올라가기 시작한다. 삼류 엑스트라의 배역표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집어 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