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사는 법

삶은 시작과 끝이 같은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

by 사월의일곱번째날

스포일러가 있는 영화


영화를 볼 때 결말을 미리 아는 편이다. 일부러 찾아보는 건 아니고, 리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괜찮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영화가 지루해진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반대다. 주인공이 죽는다는 걸 알고 보면, 그가 웃는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고 볼 때는 그냥 웃음이었던 게, 결말을 알고 나면 마지막 웃음이 된다.


삶도 그렇지 않나. 결말은 이미 나와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결말을 향해 걷고 있다. 태어나고, 죽는다. 예외는 없다. 이건 스포일러가 아니라 전제다.



모래시계의 양쪽 끝


모래시계를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카페 테이블 위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작은 것이었는데,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가 일정하다는 게 묘하게 눈에 걸렸다. 빨리 떨어뜨릴 수도 없고, 천천히 흘릴 수도 없다. 유리관을 기울여봐야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위쪽과 아래쪽은 정해져 있고, 모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삶이 그 모양이다. 위쪽 — 탄생. 아래쪽 — 죽음.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는 본인이 정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모래시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 모래알 하나하나에 무엇을 새길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길이가 아니라 깊이라고. 욕망에 휘둘리는 인생은 낭비일 뿐이라고. 2천 년 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가 한 말인데, 카페에서 모래시계를 바라보던 오후에 그 문장이 떠올랐다. 떨어지는 모래를 많게 만들 수는 없다. 대신 모래알의 밀도를 바꿀 수는 있다.



바위를 밀어올리는 사람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 사람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어차피 끝이 같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쪽. 다른 하나는 끝이 같으니까 더 단단하게 채우겠다는 쪽.


알베르 카뮈가 쓴 『시지프 신화』가 전자의 함정을 잘 보여준다. 시지프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올리고,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고,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간다. 영원히. 결말은 없거나, 있다면 반복 그 자체다. 부조리의 극단이다. 그런데 카뮈는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잘 와닿지 않았다. 바위를 밀어올리는 게 왜 행복인가.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카뮈가 말한 건 행복이 아니라 태도다. 결말이 없는 일 — 혹은 결말이 이미 정해진 일 — 을 그래도 자기 의지로 계속하는 것. 그게 허무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다. 삶에 대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지 말고, 삶 그 자체를 이유로 삼으라는 것.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장에서 멈추느냐, 한 발 더 나아가느냐다. 멈추면 허무주의가 되고, 나아가면 태도가 된다.



안쪽에서 무너지는 방식


허무주의만이 함정은 아니다. 또 다른 함정이 있는데, 이쪽이 더 교묘하다.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이다.


자기혐오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쪽으로 모래를 쏟아버리는 거다. 자기연민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안 되는 걸까'라며 모래가 떨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 거다. 둘 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이 두 가지에 쉽게 빠진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 꽤 많다. 나도 그랬다.


문제는,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거다. 바깥의 누군가가 나를 깎아내리면 피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안쪽에서 올 때는 도망칠 곳이 없다. 기쁜 일이 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잘한 일 앞에서도 '이 정도 가지고'라며 스스로 평가절하한다. 모래시계의 모래를 직접 손으로 움켜쥐어 아래로 밀어넣는 꼴이다. 떨어지는 속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자기혐오는 그 속도를 체감상 두 배로 만든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다. 세상이 어떻든, 결말이 어떻든, 자기 자신을 적으로 돌리면 사이를 채울 여력이 남지 않는다.



51년의 건반


빌 에반스라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형이 자살했고, 연인이 세상을 떠났고, 친구도 잃었다. 말년에는 약물과 건강 악화로 쇠잔해졌다. 전기를 읽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 앞에 계속 앉아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질 이유가 차고 넘쳤을 텐데.


그런데 에반스의 연주를 들으면, 그 모든 비극이 건반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결코 절망으로 흐르지 않는다. 관조적이고 서정적이되 자기 연민이 없다. 에반스는 "명백히 이해하지 못한 것을 건반 위에 올려놓기보다는 단순하게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이해하는 것, 자기 손에 잡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삶이 그에게 무엇을 던지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 건반을 누르는 일 — 을 계속했다.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대신,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쪽으로 몸을 돌린 거다.


이게 아마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는 방식 중 하나일 거다. 거창한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 자기가 이해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 자기 자신과 싸우느라 모래를 허비하지 않는 것. 모래가 떨어지는 동안 건반을 누르는 것. 그게 전부일 수도 있다.



개차반과 존엄 사이


누군가는 결말이 정해져 있으니 마음대로 살겠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는 본인만 안다. 밖에서 보기에 화려한 인생이 안에서는 공허할 수 있고, 밖에서 보기에 평범한 인생이 안에서는 꽉 차 있을 수 있다. 채점표는 각자의 것이다.


다만 '마음대로'의 방향이 갈린다. '어차피 죽을 거 개차반처럼 살다 가자'와 '갈 때 가더라도 존엄은 지키고 가자'는 같은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정반대의 결론이다. 전자는 결말을 핑계로 과정을 포기한 거고, 후자는 결말을 인정한 채 과정을 붙잡은 거다.


세네카가 네로 황제의 명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남길 수 있는 건 '삶의 이미지'뿐이라고 말했다. 재산도 권력도 남기지 못하는 자리에서, 남은 것은 어떻게 살았는가의 잔상뿐이었다. 그게 존엄이라는 단어의 실물이다.



모래알에 새기는 것


다시 모래시계 이야기로 돌아온다. 위쪽과 아래쪽이 정해져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도 바꿀 수 없다. 그러면 남는 건 하나다. 떨어지는 동안 무엇을 하느냐.


정해진 답 같은 건 없다. 그렇다고 답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유일한 자유일지 모른다. 시지프는 바위를 밀어올리는 방식을 선택했고, 에반스는 건반을 누르는 방식을 선택했고, 세네카는 편지를 쓰는 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아직 내 방식을 다 찾지 못했다. 무언가를 만들고, 때때로 글을 쓰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 모래알 위에 어떤 무늬로 새겨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모래가 다 떨어졌을 때, 그 자리에 서서 "나름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거창할 필요 없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된다. 그게 아마,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사는 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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