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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Sep 12. 2024

05_나의 영정 앞에서 울어주세요.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딱하다 한숨만이라도 부탁해요.

여전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죽음으로 가는 과정 중에 느껴지는 고통이 귀찮고 성가실 뿐. 어쩌면 이미 끝나졌어야 하는 삶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오래 살지도 않은 인생, 어찌 이리도 넘겨야 할 고비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겨울 죽을고 비를 넘긴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불명열에 시달려 병원에 한 달을 살았고 병명과 처방을 알아내기 위해 골수까지 수시로 뽑아내는 지경까지 갔었다.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절하기 일 수였고 한 달을 누워만 지냈다. 그러다 의사가 나의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준비'를 하셔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병원에 드러누워 있으면서 지극한 가족들의 보살핌이라거나 따뜻한 응원의 말 한마디라도 듣지 않는가. 나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한 달여 시간 동안 고열로 인한 나의 고통보다는 부모라는 사람들이 교대로 내 옆을 지키고 있다는 불편함이 더 고통스러웠다.


하마터면 고열로 졸도를 해 죽을 수 있는 아들이란 존재 앞에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거나, 귀찮고 피곤하다는 그런 모습들을 내 눈으로 보는 순간에는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일부러 의식을 놓으려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부모 앞 세워 저승 가는 자식은 평생 불효자라는 말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것보다 나의 영혼의 안락함을 맞이하고 싶었었다.


언젠가는 그런 소릴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백일이 막 되어갈 무렵, 밤새도록 칭얼거리고 울어댔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라는 존재는 포대기에 싸인 나를 냅다 집어 들고 마당에 던지려고 했다고 한다. 엄마라는 사람은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지는 모르겠지만, 일곱 살 차이 나는 막냇동생이 백일 지나 광광 운다는 이유로 피멍이 들도록 파리채로 두들겨 패는 모습을 목격하고 나를 집어던지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너무나 생소해서 무감각하다면 슬픔이라는 감정과는 너무나도 친숙해 아주 무딘 편이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깡촌에서 같이 나고 자란 친구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린 적이 있다.


누가 그랬다. 

자식 잃은 부모의 울음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짐승의 포효와도 같다고.


그날 갑작스레 죽어버린 친구의 빈소에서 그 영정 앞에 절여진 배추처럼 퍼져 앉아 말 그대로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상태를 오가며 자식을 잃은 어처구니없음과 애통함에 목 놓아 울던 친구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을 먼저 했었다.


말했듯 평생을 슬픔이라는 감정과 너무나도 친하게 지내온 덕분인지 같이 나고 자란 친구의 죽음이 허망하긴 하지만 언제나처럼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는 친구 어머니의 모습만 넋 놓고 지켜보았던 것 같다.


'우리 집 사람들도 내가 지금 당장 죽어버린다면 저렇게 울까.'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한다.

이웃에서 같은 해, 같은 달에 나고 자란 터라 죽어버린 아들이 더 생각나고 꺼져버린 그 싱그러운 젊음에 대한 허망함에 더 목놓아 울었으리라.


그 품에 안겨 비어버린 동공을 내리깔고 아주머니의 등을 토닥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내가 죽었을 때 우리 가족들의 모습과 빈소에서 발견한 이 친구의 가족들의 모습을 대조해 본다.

십 년이 가깝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의 생각은 변치 않는다.


그들은 울지도 않을 테고, 쓸데없이 죽어버린 탓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것이 귀찮고 성가실 뿐일 거라고.



왜 살아야는지에 대한 이유를 더 이상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인생은 혼자라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입한다.


길지 않은 인생 굽이마다 각각의 사연이 있는 기구한 팔자이지만 죽어지지 않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잠깐 스치듯 생각을 해본다. 역시나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그 과정에서 느낄 고통이 성가실 뿐이다. 


가끔은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웬만한 일들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죽음이 애석하긴 하나 썩 와닿지는 않는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그리 두 팔 벌려 환영하지는 않는다.


둘이나 되는 조카들을 아주 예뻐한 적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나의 심장이라도 도려내 줄 것처럼 예뻐하고 사랑했다. 외국에 살고있는터라 마음껏 보지 못함에 사진을 보내달라 하기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조카들의 사진을 밤새도록 본 적이 더러 있었더랬다.


최근 조카들을 본 적이 있었다. 

마침 막 일곱 살에 접어들고 있고 이제 막 백일에 접어든 남자아이들이다.


그 생떼같이 어린아이들에게서 나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집히는 대로 두들겨 맞고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들어야 했던 여섯일곱 살. 

한 겨울 내복을 입은 채 언제나처럼 일어난 부부싸움 소동을 잠재우려고 무릎을 꿇고 연신 잘못했다 빌었던 여섯일곱 살. 발목까지 자막히 눈이 쌓이던 섣달그믐날 쫓겨나 외양간 한편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야 했던 여섯일곱 살, 한 여름 뙤약 볕 아래에서 소가 끌법한 쟁기를, 욕 바가지 먹어가며 돌밭에 고랑을 내는 일을 해야 했던 여덟 살, 칭얼거리고 운다는 이유로 포대기에 싸인 채 바깥 내 내던져질 뻔 한 백일...


그러면서 나의 불행하고 축축하며 어둡고 슬프기만 한 유년시절을 연상케 하는 조카들이 덜 예뻐졌다.


동생이라는 존재는 또 한 마디 보태고 거든다.

'그렇게 이쁘다고 말만 하지 말고 돈이라도 한 푼 주든지 뭐라도 하나 사 오던지.'


나의 형편과 사정에 관심도 없는 엄마라는 사람도 역시나 가만히 있지 않는다.

'네가 삼촌이냐, 남보다 못하다. 둘째 백일잔치에는 못 와도 돌 반지 금 값이라도 보내라.'


그들은 과연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기나 할까. 아니 관심이라도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남보다 못한 피를 나눈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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