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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Sep 13. 2024

06_나만한 사랑

조건없는 사랑은 없다.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조건부다.

제대로 사랑이라는 것을 배운적이 없어 주는것도 받는것도 여전히 서툰 삼십대의 독신남이 되어버렸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깨물어주고싶을 만큼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마냥 끌어안고싶고 집에 데려가 한 시도 눈을 떼지않고 지켜보다 밥을 챙겨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에 대한 감정을 대강 이해하고 있는 것일테다. 이것을 사람에게 연결 시킨다면 그것이 사람간의 사랑이 될 것 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는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마음편한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쏟아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개는 어지간해서 내 등에 칼을 꽂는 듯한 상처를 주진 않을 것 같다. 다만 유전적인 종의 특성상 나보다 먼저 죽게될 것 이고, 강아지를 너무 사랑해서 동날 동시에 죽는 계획을 세운다면 그야말로 미친놈 취급을 받게될테니 이쯤에서 접어둔다.




불행한 인생사에서 그나마 다행인점이 하나 있다면 주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결혼을 종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라고 있는 존재들도 그러하고 가족이라는 허물을 쓰고있는 사람들, 친구들까지도 결혼에 대한 말을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서른하고도 셋이 되어버린 나이지만 내가 이뤄놓고 쌓아놓은게 없는걸 알아서인지 대체적으로 연애나 결혼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얼마전 한국에 휴가를 갔다가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결혼에 대한 말을 난생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하는데 그 전에 웬만하면 장가를 가지,'


아들이라고 하는 대상, 우리 세대에서는 웬만한 집에서 떠받들다싶이 하는 장남이라는 사람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것이 고작 '정년퇴임'이라는 이유때문에 하마터면 그 앞에서 폭소를 터뜨릴뻔했다.


보통, 부모라는 사람들이 자식들과 오랜만에 대면을 할 때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어디 괜찮은 사람이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느냐' 따위의 질문으로 자식의 연애생활의 안녕을 먼저 묻는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인물인지 정년퇴임과 나의 결혼을 연관짓는게 퍽 우스운 일이다.


남의 잔칫집에 참여하는 것, 남들과 어울려 노는것을 극도로 꺼리는 그가 주변인들의 결혼식장에 축의를 하러 뻔질나게 다녔을리 만무하다. 동생이라는 사람의 결혼식장에는 분수에 넘칠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긴 왔더라만은 모르긴 몰라도 우리집 부모되는 자리로 찾아온 사람들이 그리 바글거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독거중이기도 하거니와 독신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함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한국남자다.

쉽게말하면 보잘것없는 평균이하의 남자일 뿐이란 얘긴데 모아놓은 재산도, 남들이 우러러볼만한 직장도 갖추지 못했는데 시부모가 될 사람들이라거나 시동생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관계가 이 모양 이꼴인데 감히 어떤 사람을 반려인으로 들여 누구 인생을 망칠지가 두려워 결혼은 꿈에라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의 살아온 환경을 보면 답이나온다.


태어나서 결혼이라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들인데 마땅찮은 모습을 평생 보고 자라왔으니 결혼에 대한 로망이나 환상이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쓰는 돈에도 꽤 인색하고 벌이가 썩 좋지 못한 양반께서 얼마나 보태주시려고 나의 결혼에 대한 발언을 하는지가 몹시나 궁금할 따름이다.


여하튼 부모라는 존재들부터 친구들까지 어디 하나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을 여간해서 본일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보면서 결혼이라는 것은 다음 생에 해보기로하고 이내 접어둔다.


이 또한 서글픈일이다.

보고자란 모습에서 배울점이 없어 남들 다 하는 어떤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증오하리만큼 싫은 모습에서 티끌만한 배움이 고작 포기라니. 꽤나 서글픈일이다.



다소 사이코패스같은 모습을 가진, 슬픔에 절여져 그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스쳐지나가는 짝사랑이라던가 며칠 반짝하는 풋사랑말고 같이 한 해 두 해 넘기며 평생 함께를 다짐하고 미래를 꿈꾸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2년 반을 사귀며 약 2년을 동거를 하며 일주일의 7일, 하루의 절반 이상을 붙어있던 단짝같은 존재였고 진심을다해 사랑을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에게서 받는 사랑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만큼이면 평생을 바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명절이면 그 사람의 집에 과일이며 고기도 챙겨보내고, 생일과 크리스마스엔 어떤 기가막힌 선물을 해줄지 고민하는 것도 행복했으며 계절마다 철마다 휴가를 함께하는 것도 즐거웠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을하면 사랑을 하는 그 자체로서 만족을해야 순탄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것이 나의 지론인데 그와 상반되게 누군가를 만나는 내도록 여전한 불안감을 느낀다.


사랑이란 감정을 받아본적도 배워본적도 없기에 사랑이란 행위에 매우 서툴고 어수룩하며 제대로 주는법도 받는법도 모르는 미련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저 퍼주기만 했었다.


시간과 에너지, 돈과 선물, 눈물과 웃음 하다못해 나만 알고있는 나의 비밀이야기까지 퍼담아주며 세상을 다 가진듯한 착각속에 빠져살았다. 뭐,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기본값이라면 나의 바보같은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사람과 이별 직후 내게 남은것은 공허함과 카드값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애정결핍 환자라는 소리, 감정상태가 불안정해 덩달아 불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사랑 역시나 하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때보다야 조금 더 철이 나고 성숙해졌다면 지금은 좀 낫겠지 하겠지만 그 사람이 던져버린 언중유골에 맞아 아직도 얼얼함이 남아있다.


눈이 깜짝하면 마흔일테고 그러다보면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하얗게 세어버린 노인이 될텐데 그 때에는 사랑하는 방법과 사랑받는 방법을 좀 더 알게될까.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로서 삶을 시작하고싶다.

한 어린아이의 아버지로서 다음 생을 시작하면서 젖병을 무는 것, 뒤집고 기는것, 걷고 뛰는 것 나중에 이르러서 면도하는 것 까지 다정히 알려주며 사랑이 무엇인지, 부모가 주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을 받는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려주겠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싫지만, 신이 있어 다음 생을 내게 준다면, 누군가의 아버지로 다음 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부모라는 사람들의 아버지로 태어나 사랑에 대해, 따뜻함에 대해 일러주고 어떻게 말을하는것이 부모인지, 어떻게 자식을 대하는 것이 부모의 참된 모습인지를 알려주겠다.


온 몸에 털이 곤두 설 만큼 다음 생에라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위인들이지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부모가 처음되어봐서 서투르다.'라는 같잖은 변명따위는 통하지 않을만큼 얼얼한 사랑을 주고야 말테다.

내가 지금 이토록 절절한 외로움에 사무쳐 사는만큼. 당신들은 얼얼할만큼의 사랑을 받도록.

다만 당신들이 마침내 내가 전생에 당신들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조건하에, 그 고통에 평생 몸부림치며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도록 해주는것이 나의 복수가 될테니까.


역시나 내가사는 세상엔 조건없는 사랑은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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