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chard B Sep 13. 2024

07_삼십 대에 승무원이 된 독신남

여전히 숱한 걸림돌에 넘어지고 찢기는, 여전히 만신창이인 삶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나부끼고 흩날리던 이십 대 후반, 드디어 정해진 꿈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승무원이라는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숱한 걸림돌에 넘어지고 여기저기 찢기며 여전히 만신창인 삶을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중일까. 


굳이 애를 써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발악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평범함이라는 기준치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던 나는 한 없이 작아지는 모습과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로 뚫고 내려가는 자존감에 내놓고 이것이 내 목표요 고로 내 꿈이요라고 함부로 말을 하고 다닐 엄두도 없던 사람이었다.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을까 쓸데없이 사람들 앞에 멋있게 보일 수 있는 어떤 화려한 직업을 갖길 원했고 그러면서 항상 마음속에서 갈망하고 있는 자유의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갖길 바랐다.


나를 품고 있는 세상이 좁을지라도, 나를 가두고 있는 울타리가 철조망에 에워쌓여 있더라도 혼자 몰래 간직하며 꾸는 꿈을 크게 갖는 것은 죄가 되질 않으니 남몰래 나의 갈증을 해갈시켜 줄 만한 직업을 갖길 원했다.


그러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눈에 띄었는데, 그도 참 할 말이 많다.

승무원이라면 구척장신에 간장종지만 한 얼굴, 당장 단단하게 속이 찬 가을 무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콧날과 턱선을 가져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목표로 삼은 후 나는 더 내면으로 파고들었고 자신감과 자존감은 더욱더 바닥을 쳤다.


학벌이 좋은 것도, 스펙이 좋은 것도 아녔고 남들 앞에 그나마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남들 다 잘하는 영어 하나였다. 스펙경쟁력, 외모경쟁력 하다못해 뒷받침하고 응원해 주는 가족들이란 뒷 배경의 경쟁력에서도 밀리는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살 수 있을까를 매번 고민하면서 승무원이라는 목표를 포기하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끝내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 천신만고 끝에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기반을 둔 외항사 승무원을 만 서른한 살에 하게 되었고 그 일 년 후 일명 '대감집'이라고 일컫는 대형 항공사로 이직을 성공해 홍콩에 와 훈련을 받고 있다. 물론 이 훈련을 무사히 마쳐야 정식 '대감집 비행노비'가 될 테지만 일단 긍정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며 글을 적어 내려가본다.


살면서 이토록 무언갈 오랫동안 깊이 염원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이것을 이루고 나면 나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바뀔 것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첫 번째 항공사에 입사를 하고 난 후에 약 반년 동안은 장밋빛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비행이라는 것을 일로서 하게 되고 내 주머니를 털지 않고도 외국에 가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호텔에 머물면서 그 나라를 여행하는 재미도 느껴봤고 꼭 이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염원하던 어떠한 목표를 이루었다는 쾌감이 이루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떠한 허전함과 내면에 자리 잡은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첫 항공사에 합격을 하던 날, 기쁜 마음에 부모라는 존재들을 포함한 가족들이라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연락을 돌렸지만 모두의 반응은 정말 시큰둥함 그 외의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정도냐면 최근 퇴사하기 전까지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왜 네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가끔 휴가차 한국에 들러 본가에 갈 때에도 비행이 어떤지, 외국생활이 어떤지에 대해 묻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화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마음고생했을 것을 아는 친구들이 모여 케이크도 제작을 해주고 술도 사주면서 축하를 한다고 이런저런 선물을 챙겨주었는데 정작 가족이라는 사람들에게서는 미소가 담긴 응원의 말 한마디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렇게 생활하다 조금 더 나은 복지와 근무환경, 승무원으로서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름난 홍콩 기반의 외항사로의 이직에 성공했을 때에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해 왔길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들보다 더 못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생때같은 아들을 둘이나 놓은 여동생의 하는 말에는 시시콜콜 장단을 쳐주며 반응을 하는가 하면, 누가 보면 벙어리에 귀머거리라고 할 만큼 말없는 막냇동생이 본가에 온다고 하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어화둥둥해 주는 모습은 여전하다.


일곱 살 때인가, 시골에 살 때 생일날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이런저런 음식을 차리고 한복을 입고 생일잔치를 했던 이후 집에서 나를 위한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요리에 관심이 있고 꽤나 잘한다는 이유로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음식 장만하는데 동참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동생 시집갈 때에 이바지 음식을 하거나, 사위가 오는 날 다리가 부러질만한 저녁상을 차리는데 부엌일을 해야 했던 것도 나였다.


내가 받은 상은, 언제나 사이가 좋지 못한 모친과 부친께서 도의적으로 차려주는 아침상이나 저녁상에 '눈치껏' 끼어서 밥을 먹는 것뿐이 없었고 그마저도 좋은 분위기에서 얼굴을 맞대고 먹은 기억이 없다.


휴가차 고향에 가 있던 어느 날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들어오니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이런저런 음식을 시켜 맥주를 먹고 있던 모습을 발견했던 적이 있다.


나의 꿈과 같은 그런 분에 넘치는 목표를 이루고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대폭 향상되었다고 생각을 했으나 이런 모습들을 마주할 때에는 여전히 상처가 되고 여전히 쓰리다. 



워낙에 나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신경한 사람들을 가족이라는 존재들로 두다 보니 타향살이를 할 때에도, 외국살이를 수 년째 하고 있는 지금에도 가족들이 그립다거나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동료들이나 외국에 나와 살며 사귄 친구들이 가족들과 통화를 한다거나 애정표현이 넘쳐나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그들의 가족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외국에 친히 방문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기함을 한다. 


비행을 하다 보면 한국손님들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가족단위 손님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탑승하는 젊은 부부들부터 아들손자며느리 삼대가 함께하는 대단위의 가족여행객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를 보는 것도 구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화목하고 웃음 넘치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는지가 참 신기해 관심을 많이 주게 되고, 내가 평생 해보지 못한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는 손님들을 보면 덩달아 신이 나 더욱 신경 써서 세심한 서비스를 해주게 된다. 그저 신나 있는 그들의 여정을 망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이 느끼는 그런 행복한 감정들을 극대화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이 끝나면 그 이질적인 모습이 눈에서 가시질 않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여전히 반문을 한다.


내 입장에서는 비행을 하다 비행기 창 밖으로 날아가는 용을 봤다고 하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



인생에 얼마나 고비가 많고 걸림돌이 많은지 세계적 규모의 항공사에 이직을 해와 훈련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참 별의 별일을 다 겪고 있는 와중이다. 


재작년 세 들어 살던 집에 묶여있던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했다.

아주 큰돈은 아니지만 워낙에 가진 것 없는 나에겐 크나 큰돈이고 외국에서 또 새로운 정착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돈인데 1여 년 동안 보증금 반환으로 씨름을 해오던 중 그 집주인이 죽어버렸단다.


한국에 있지 않아 이 일을 처리하는 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훈련에 빠지면 다음 기수로 재입사를 해야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퇴사까지 당할 수 있는 처지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와중이다.


또, 바로 직전에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마지막 급여정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 세금을 빙자한 어떠한 알 수 없는 항목으로 약 70만 원을 뱉어내라고 한다. 이 것이 모두 오늘 하루에 벌어진 일이다.


가뜩이나 물가 비싼 싱가포르와 홍콩에 연이어 살면서 큰돈 구경은커녕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것에도 손을 발발 떠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홍콩에 오기 전 한국에 잠깐 머물면서 모친에게 돈 얘기를 잠시 한 적이 있다.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얼마의 돈을 융통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슬쩍 물어봤다가 '양심도 없는 놈'이라는 소릴 들어야 했고 그녀의 전매특허 공법, '니 아비한테 말해봐'라는 강수에 꼬리를 내리고 단 돈 20만 원을 가지고 홍콩으로 넘어왔다.


다행히 교육기간 동안엔 호텔을 제공을 받고 중간에 교육비가 소정지급되기에 마냥 손가락만 빨진 않을 텐데 이마저도 훈련에서 탈락을 하면 정말 마이너스인 채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해외생활, 하다못해 타지에 자취생활을 한다고 하면 큰 목돈은 주지 못하더라도 마른반찬이라도 바리바리 챙겨가 이것저것 손봐줄 법 한데 우리 모친과 부친은 그러는 일이 없다.


딸과 막내아들에게는 지극정성이지만 유독 나에게는 대단히 박하게 군다.


살면서 나에게 투자한 어떤 비용을 자꾸 고집하면서 되돌려받길 원하고 나의 양심을 운운하는데 일단 어떤 '효도'를 받으려면 내가 자리를 빨리 잡아야 더 그럴싸한 '효도대접'을 받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또 그게 아니더라도 도의적으로, 물론 부모자식 간에 도의적이라는 말이 통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단 돈 몇 십만 원 정도는 찬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데 그 역시도 나에겐 과분한 욕심인가 보다.


그러는 와중에 홍콩으로 나오기 전까지 태어난 지 곧 백일이 될 둘째 조카를 위해 몇 십만 원씩 물 쓰듯 쓰는 나의 생물학적 어머니의 이중적인 모습에 기함을 했다.


외손주와 아들의 차이가 있어 팔이 굽는다면 적어도 내 방향으로 굽진 않겠구나 생각을 하며 또다시 쓴 입맛을 다셔본다.



홍콩에 온 지 2주가 넘어가는데 가족들 그 누구도 연락 한 통이 없다.

언감생심 공항까지 배웅 나와 눈물의 이별을 하리라고는 애초부터 생각지 않았는데 보름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 소식조차 없는 것이 기가 찰 노릇이다.


고향에서 어머와 함께 이름난 큰 한식집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은 이 친구가 연락을 해와 '너네 어머님이 식사를 하러 오셨다.'라고 했고 뜬금없이 친구의 어머님께 가서 '나 누구누구 엄마다, 우리 아들은 홍콩에 갔다.'는 묻지도 않는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엄마들끼리의 스몰토크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름은 아는지, 그리고 나에게 그 흔한 문자 한 통 하지 않으면서 밖에 나가 나에 대한 묻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사람들은 생전 나의 일상이라던가 나의 교우관계, 직장생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학창 시절에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거의 목을 내놔야 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고, 가끔 데려오는 친구들 앞에서도 욕을 하며 싸움을 하는 게 부모라는 사람들이다.


게다라 여러 번 보아도 내 친구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여동생과 막냇동생의 친구들은 이름도 성도, 하는 일도 알고 있다.

이렇게 가족이라는 구성집단에서 반쯤 걸쳐져 있는 발을 뺄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



한 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사회생활이라는 더러운 때를 온몸 구석구석에 묻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다.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은 나의 본거지이며 내가 기원한 장소와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그 지탱력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독사같이 못된 사람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것을 여태껏 몸소 당하고 느끼면서 배워온 것인데 남들보다 더 불편하고 어색한 가족들 보다는 나를 이용해 먹는 사람들 틈에 껴서 잠시라도 편안하고 조금이라도 더 웃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나는 호랑이굴이나 맹수의 아가리로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을 매번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느끼는 나는 오늘도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혼자이며 외로움과 싸우고 있다.


물론 바깥에 나가면 호탕한 웃음과 유머로 사람들과 아주 폭넓고 다양한 대인관계를 자랑하지만 언제나 빈 깡통에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일회성 만남으로 잠깐 스쳐가는 승객들이 더욱 편안한 것일까.

사적인 감정을 빼고 일로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까.


일 년을 몸담았던 전 항공사에서 숱하게 받았던 칭송편지들을 가만히 떠올려오는 밤이다.


왜 피를 나눈 가족들이 그토록 불편한 것인지 또 한 번 명확해지면서 단절을 다짐하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06_나만한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