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내일 죽더라도 아쉽지 않게, 나는 인도로 간다

유방암이 가르쳐준 것들, 그리고 49세 무모한 도전

by Mimi

발리에서 새벽 1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시간 반을 날아 서울에 도착하니 오전 8시 30분.

서울역으로 이동해 다시 KTX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오후 3시였다.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메고,
비행과 기차를 거쳐 집까지 오는 이 여정이
해가 갈수록 버겁게 느껴진다.

지방에 산다는 것이 이럴 때 유독 크게,
온몸의 통증으로 다가온다.


유방암 수술과 치료가 끝나자마자 런던으로 떠났었다.
그곳에 살면서도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한국 병원에 와야 했다.

발리에서 6개월을 지내느라
지난 5월 예약해 두었던 정기 검진을 미뤘고,
8월이 되어서야 다시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이번 검진은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안도감 뒤에는 늘 서늘한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매번 검사 때마다
어딘가 의심스러운 부위가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다시 받곤 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유방암이 재발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속의 나는
재발 사실을 알자마자 공포에 질려
엉엉 울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두려움은 한참이나 가시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제 재발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라고 되뇌었지만,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만큼 단단하지 못했나 보다.

“언제든 다시 재발할 수 있다.”
그 꿈은 마치 내게
그렇게 경고하는 듯했다.

며칠 동안 그 공포가 마음에 눌러앉았다.
만약 정말 재발한다면
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죽음이 언제
코앞으로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끝없이 잠기게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절대 화학적 항암치료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 고통을 견딜 자신도,
그보다 더 큰
“살고 싶다”는 의지도

지금의 나에겐 없다는 걸 안다.

돌봐야 할 어린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기어이 삶을 붙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그래서 내 결론은 항상 같다.


사는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
내일 당장 죽더라도 아쉽지 않게.

발리에서 6개월 동안
오직 요가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 인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 결론 덕분일 것이다.

이제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까.

또 다른 내일이
나에게 허락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유방암 진단 이후, 나는
장기적인 계획(long-term plan)을 세우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며 산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건강하지 않으면
장기적 플랜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백만장자가 되든,
세계적인 셀럽이 되든,
사회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가가 되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모두 한 줌의 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패션업계에서 일하면서,

나 역시 그 화려함과 경쟁의 분위기에
온전히 젖어 살았었다.

언제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남보다 내가 돋보여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식이었고,
“나 이렇게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
라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삶에
매달려 살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세상의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자기 마음을 돌보며 사는 사람들을 두고

“열정이 없다.”
“현실 도피다.”

라며 시니컬하게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방암을 만나고,
요가를 접하면서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다.

어떤 삶이 더 좋고,
어떤 삶이 더 의미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는 흐름에 따라

내 삶은 자연스레
이곳으로 흘러왔을 뿐이다.

패션업계에 있을 때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던,

아니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삶으로.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용을 써야 했던 패션 필드에서,

우주와 자연의 이치에 바탕을 둔
‘영적인 과학’이라 불리는
요가 철학을 따르며 사는 삶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극과 극은 어쩌면
서로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가의 본고장 인도에서,
나는 요가 구루들의 숨결과 전통을
더 깊게 배우고 싶었다.

발리의 요가 선생님들도 훌륭했지만
요가 철학에 대한 갈증은
늘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발리에서 감기때문에

취소했던 TTC(Teacher Training Course, 지도자 과정)를
인도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아쉬탕가 요가의 창시자 파타비 조이스의
직계 후계자인 사라스 조이스의 샬라를 알게 되었다.

그는 마치 팝스타처럼
전 세계를 돌며 아쉬탕가 티칭 투어를 하고 있었고,

12월부터 딱 세 달간
인도 마이소르에서 클래스를 연다는 공지를 올렸다.

전 세계 수련생들이 몰려드는 탓에
추천제로만 학생을 뽑는다는,
마치 ‘마피아 조직’ 같은 폐쇄적인 시스템이었지만

그만큼 전통적인 아쉬탕가 요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우붓 선생님께 부탁해
추천서를 받아 지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왜 떨어졌지?
나이가 많아서?
내가 너무 비기너라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이 나이에 내가 굳이
형식과 전통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리시케시로 눈을 돌렸다.

요가 철학, 명상, 아사나를 두루 배울 수 있는
리시케시의 TTC 과정은

오히려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것.

바로 인도에서의 명상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지독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두통이 시작되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구토를 반복했다.

관자놀이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의 고통.

병원도, 약도, 마사지도
소용없던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누군가가 스치듯 말했던
“명상을 해봐.”
라는 말이 떠올랐다.

구글 지도를 뒤지다 발견한
‘Dhamma Giri’.

고엔카 선생이 생전에 머물렀던 곳이자
인터내셔널 비파사나 명상 센터였다.

10월 23일 시작하는
10일 코스를 발견한 순간,
직감했다.

“바로 여기다.”

요가 자격증보다,
어쩌면 이 비파사나 명상 코스가

나에게는 더 절실한
구원처럼 느껴졌다.

한국에 돌아와 읽은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었다.

“50대는 명상하기 가장 좋은 나이.”
“하지만 50대부터는 요가 아사나는
몸에 무리가 될 수 있다.”

뼈 아프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49세의 나역시 요가를 하며
내 몸의 늙어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추석만 보내고,
그 다음 날인 2024년 9월 19일.

나는 인도 뉴델리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라면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을 국적기였지만,
운 좋게 합리적인 가격의 티켓을 구했다.

비빔밥이 나오는 기내식,
사이버 승무원이 안내하는 안전 수칙을 보며

IT 강국 대한민국 국적기를 타고 가는 인도여정이 설레였다.


내가 인도를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인도는 위험해.”
“여자 혼자 거기서 뭐 하려고?”
“강간 사건도 많고, 사기꾼도 많다던데.”

하지만 발리에서 만난 요가 친구들에게
인도는 그저 또 하나의 여행지였다.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보다는
그리움과 설렘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표정을 믿기로 했다.

남들이 말하는 그 ‘위험한’ 곳에서
나는 어떤 평화를 만나게 될까.

그렇게 나는 뉴델리 인디라 간디 인터내셔널 공항에 도착했고,
나의 인도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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