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어느새 패션 브랜드의 운영자가 되어 있었다.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여러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 뒤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었고, 신진 디자이너로서 백화점 팝업스토어에도 입점했다.
매출은 좋았고, 그 성취감에 빠져 거의 백화점의 노예처럼 살았다.
그 숫자가 내 존재의 증거 같았다.
막내 디자이너 시절, 시장 조사를 다니며 “언젠가 내 옷도 이런 매장에 걸릴 수 있을까?”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역시 버티는 놈이 이기는가?’
그때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밤낮없이 일하며 몸을 갈아 넣었다.
매출과 성장에 취해 있었다.
� 버티는 삶의 대가
매출이 늘어나면서 직원을 고용했고, 그들의 삶까지 책임져야 했다.
패션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건 단순히 ‘디자인’이 아니었다.
회계, 세무, 마케팅, 영업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점점 무게가 버거워졌다.
어느 날, 노동부에서 전화가 왔다.
퇴직금을 요구하는 신고였다.
매니저 계약을 맺고 수익을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직원이었다고 주장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나름의 성의를 다했다고 믿었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은 늘 다르다.
그 당시엔 배신감이 컸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럴 수 있었을 거다.
그 사건을 해결하려면 변호사와 노무사를 고용해야 했다.
노동부 사건은 형사 절차라 복잡했다.
결국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났지만,
그 일은 나를 완전히 지치게 했다.
사업가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 사업을 할 그릇이 되는 사람일까?”
그때부터 무언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몸이 내게 보낸 신호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만하라’, ‘이제는 멈춰야 한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왜냐면 그 일 자체가 곧 나였기 때문이다.
그걸 내려놓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다.
경기는 침체되고, 최저임금은 급격히 올랐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고, 지병인 편두통은 더 심해졌다.
약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편두통이 올 때마다 변기통을 붙잡고
노란 물이 올라올 때까지 토했다.
그렇게 2~3일은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다 문득,
“이러다 진짜 죽겠다.”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사업의 규모를 줄였다.
직원들을 내보내는 일은
사업을 확장하는 일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재고를 처분하며
그동안 쏟아부은 열정을 접는 일은
마치 내 몸 일부를 잘라내는 것 같았다.
� 다시, 나를 배우기로
사업은 멈췄지만,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20대 시절,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유학하고 싶어
어학연수를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유학비로 집 한 채 값이 든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아쉬움이었다.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고…
이제는 나에게 투자하자.”
그렇게 40대 중반에 다시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패션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석사 과정.
IELTS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공부는 쉽지 않았다.
한 단어 외우면 다음 날 잊고,
다시 외우고, 또 잊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공부를 한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IELTS 공부는 내가 해오던 영어 공부와 달랐다.
약자를 배려하고, 환경과 지속가능성 같은 주제를 다뤘다.
그들의 논리와 깊이는 전혀 달랐다.
라이팅 시험은 외운 지식을 묻지 않았다.
나의 생각, 나의 관점을 물었다.
공부가 새롭게 다가왔다.
� 런던으로 향하다
몇 번의 IELTS 시험에 떨어지고,
LCF 인터뷰에도 불합격했지만
결국 University of Westminster에서
패션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코스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그 전부터 가슴에 만져지는 불쾌한, 딱딱한 멍울이 있었다.
계속 추적검사를 받았고, “이상 없다”는 말만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암은 자라고 있었다.
검사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것이,
어느 순간 크기가 커지자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의 검사 끝에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
“암입니다.”
그때 이미 유학비도, 비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수술만 하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암 치료는 단순히 수술로 끝나지 않았다.
방사선, 약물, 정기검진… 끝이 없는 여정이었다.
입학을 미뤘다.
2021년 1월, 그리고 또 한 번 9월로.
병원에서 의사는 말했다.
“내 가족이라면 절대 보내지 않겠어요.”
주위의 걱정, 나의 두려움.
그럼에도 나는 마음을 정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가지 않는다면 후회가 될 거다.”
✈️ 목숨을 담보로 떠난 유학
2021년,8월말 나는 런던으로 향했다.
그렇게 목숨을 담보로 한 유학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무모했겠지만,
나에게는 다시 살아보기 위한 도전이었다.
20년 만에 다시 밟은 런던의 길 위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누구는 안식년도 하는데
나도 안식년이라 생각하자.”
건강을 돌보며, 무리하지 않게 학업을 이어나가면 괜챦을 거라고,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런던 유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