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수술을 한 지 여덟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의사는 방사선 치료 후 최소 2년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런던으로 향했다.
코로나 시기였고, 도착하자마자 열흘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23kg 캐리어 두 개를 끌고 탄 13시간의 장거리 비행은
지금 생각해도 무리였다.
공항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하던 길,
몸이 덜덜 떨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힘들다”고 외치는 듯했다.
숙소는 차가웠고, 라디에이터를 올려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했다.
그대로 머물다간 병이 도질 것 같았다.
결국 돈을 더 내고 호텔식 레지던스 **‘Roman Lake’**로 옮겼다.
쇼디치 근처의 낯선 동네, 그래도 따뜻했다.
그곳에서 열흘의 격리를 마치고
드디어 학교로 향했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패션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과정.
한국인 학생 네 명이 함께 있었다.
나이도, 사연도 모두 달랐지만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오리엔테이션도 못 듣고 뒤늦게 합류한 나를
친절히 챙겨주었다.
그전까지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암 투병과 사회생활을 거치며
누군가에게 상처받을까 두려워,
경계하고 피했다.
“이번엔 제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렇게 빌었는데,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수업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1년 안에 모든 과목과 논문을 끝내야 했다.
매주 레포트, 팀 프로젝트, 튜터링, 발표 준비까지—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렀다.
영어 수업을 따라가려면
두 배, 세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 코로나 시기라 비대면 수업이 많았고,
교수님의 강의 스크립트를 보며
모르는 부분은 한글로 번역할 수 있었다.
기술의 도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공부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패션 비즈니스를 직접 운영했던 경험이
이론과 맞닿는 순간마다 짜릿했다.
Fashion Supply Chain,
Marketing and Promotion,
Strategic Management,
Retail Buying…
모든 과목이 과거의 나를 다시 불러냈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니 기억력은 떨어졌지만,
대신 이해력은 깊어졌다.
젊은 학생들이 이론을 외울 때
나는 현실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었다.
특히 ‘지속가능한 패션’과 ‘윤리적 경영’ 수업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패션도 결국 삶의 태도라는 것을.
밤을 새워 레포트를 쓰고,
영문법을 일일이 교정받아 제출하던 날들.
그 결과 Merit와 Distinction 사이의 점수를 받았다.
기뻤다. 하지만 내 오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
쉬지 못하는 완벽주의—
나는 여전히 나였다.
논문을 쓰며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치질이 생겼고, 면역력은 떨어졌다.
편두통은 다시 시작됐고,
결국 논문 제출을 한 학기 미뤄야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끝내 논문을 완성했고,
**‘Merit’**으로 졸업했다.
졸업이 커리어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버텨낸 내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어쩌면… 다시 일할 수도 있겠지.”
그 생각이 아주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
런던에서의 삶은 조용하고 단순했다.
코로나에 걸려 혼자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견뎠다.
유방암 정기검진을 위해 한국을 몇 번 오갔고,
런던에서도 검진을 받았지만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한국만큼 세밀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절로 나왔다.
“대한민국 의료보험, 진짜 최고야.”
핀츨리 역 근처에 살았고,
햄스테드 파크, 켄우드, 리젠츠 파크, 프림로즈 힐—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공원들이 있었다.
그곳을 걷는 건 내 일상이자 치료였다.
원하는 공부를 하며,
런던의 공원을 걷고,
슈퍼에서 유기농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하며 먹는 평범한 하루.
그 모든 순간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여.”
지금도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행복한 내가 보인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실감했다.
‘살아 있다’는 것.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천천히 걷는 그 시간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 “그때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떠났지만
결국은 ‘살기 위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