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게을러도 된다
매번 서프라이즈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여태껏 연애를 많이 해보진 못했지만, 각각의 기간들을 합하면 약 9년 정도니 20대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보낸 셈이다.
'막 퍼주는 사람'이었던 나에게, 무조건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야 한다는 소리는 터무니없는 소리였고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 때로는 절반에서 절반 이상을 부담하기도 했다. 상대방의 성격이란, 걔 중에는 자신이 베푼 만큼 꼭 돌려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계산 없이 먼저 베풀고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는 뜻이다.
20대 초 어린 나이에 퍼주는 성격이었던 내게, 각종 기념일은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고, 부지런을 떨며 빼빼로며 초콜릿 등을 만들기도 했다.
흔히 하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사소한 것이라도 남자 쪽보다는 내쪽에서 거의 준비했다.(나는 아마 전생에 남자였는가...)
어쩌면 남자의 시간에서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크고 작은 이벤트를 비밀리에 준비하며, 내심 그가 아주 좋아하고 행복해하길 바랐다. 예를 들면 그 남자의 자취방을 비밀리에 대청소를 해놓는다든지, 맛있는 간식들을 사서 그 남자가 공부하는 장소에 깜짝 방문한다든지,
(직장인에게는) 그 남자의 직장과 집이 있는 지역으로 (물론 주말에) 예고 없이 출발한다든지...
연애를 하면서 이런 '과도한 부지런함'들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일종의 사랑 표현 방식이었달까.
최근에야 이런 일체의 행위들이 정작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정말 나 자신은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어서 체력이 떨어졌는지) '오히려 귀찮았던' 것이다. 정작 내 본심은 귀찮고 쉬고 싶은데, 단순히 이렇게 해서 그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각종 이벤트를 벌여온 것이다.
20대 초중반 시절에도 100프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 시절에는 꽤나 외로웠고 홀로서기를 잘 못했으니까)
그 결과인지, 지금은 꽤나 여자 같은 성격의, 사소한 데에서 (자기 말로는 장난이지만) 징징대고 잘 삐치는 연인이 옆에 있다. 장난스레 본 사주팔자에서 전생에 내가 남자, 그가 여자였다는 얘기도 들었다.
가끔씩 사소한 거에서 토라진 그를 위해, 여태 종종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허나 지금은, 첫째로 백수라서 여력도 많지 않고, 예고 없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거나 기념일을 매번 챙기기가(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14일 데이 같은 것)
체력이 부친다.
부디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그와 잘 지낼 수 있길.
오늘도, 어제 조금 실망한 듯 보였던 그를 위해, 새벽 5시 반에 잠을 깨고 곧잘 든 생각은, 운전해서 왕복 약 2시간의 여정을 통해 그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이미 조금의 대화로 그도 사실 약간의 휴식을 원하고 오늘은 각자 쉬기로 했음에도,
이런 '일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마치 이런 일들은 그의 행복을 위해 완수해야 할 퀘스트나, 임무 같았다.
이렇게 '시동'이 걸릴 때마다, 떠오르는 두 번째 남자 친구.
그는 침대 밑에 페트병 수십 개를 감춰둘 만큼(나중에 이사할 때 발견) 게으르고 침대에서 빈둥대는 것을 즐기며 거의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던 덩치가 꽤 있던 사람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을 벌이고, 누군가에게 항상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상대방의 조그만 냉대나 실망에도 멘털이 와르르 무너지고는 했던 그 시절에 그가 있어서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마치 큰 곰돌이 인형 같이 무심하게 곁에 있어주는 그의 일상이 물들어 오면, 나의 작은 걱정거리들도 다 녹아내렸다.
그와 헤어진 뒤에도 한없이 조급해질 때에 가끔씩 그를 떠올리곤 했다. 지나친 간섭이나 공감보다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상대를 참 편하게 해 주던 그의 곁에는, 마치 지친 일상에서 휴식을 취하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위로를 받았다.
그의 그런 느긋함을 닮고 싶다. 아마 5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닮고 싶은 마음만 늘상 드는 것은, 그만큼 나의 본성을 바꾸기 힘든 것일 테지.
정말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은, 내 순간적인 마음만을 따르지 않고 이런 느긋함의 향신료를 듬뿍 끼얹고 나서 그제야 다시금 이끌리는 방식의 행동이다.
그런고로 오늘은 조금 쉬고 싶다. 나도 그도 내 자동차도.
그가 정말 푹 쉬었으면 좋겠다.
서로 깜짝 이벤트보다는,
'쉬어가는 것, 휴식, 충전의 시간'들에 더 가치를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