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하다고 완전한 건 아니다.
밀레니엄이 다가오던 1990년대 끝자락,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선택과 결정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 하루를 답도 없는 걱정의 되돌이표만 그리며
마치 폐인처럼, 좀비처럼 살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은 이런 내게 머리라도 식히자며,
함께 바다나 보러 가자고 했었고, 난 그렇게 조금은 뜬금없던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쭉쭉 뚫려버린 고속도로 때문에, 몇 시간 내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의 동해 바다는 꽤나 멀고도 험한 곳이였다.
한 여름 피서철이면, 가끔 부산보다 더 오래걸리는 곳이기도 했고,
겨울에 눈이라도 올 때면, 아예 움직이는게 허락되지 않아, 갈수 조차 없는 곳이였다.
지금은 없어진 통일호 기차를 타고, 난 가끔 동해바다로 떠나곤 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야만 탈 수 있던 청량리역 강릉행 기차는,
강원도 험한 산자락를 굽이굽이, 한참을 넘고 또 넘어가야 했고,
그렇게 조금은 밀려오는 지루함에 지쳐갈 때 즈음,
어느새 마법과 같이 나타난해안길에 다다르게 된다.
해질녁 붉은 노을이 주는 눈부신 햇살은 동해의 거센 파도와 어우러져 금색으로 빛나고,
창문 넘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바다의 내음은 내 가슴 속 심장까지 파고들어 간지럽혔다.
마치 내 머리속 모든 근심과 걱정을 위로해 주는 듯, 선물같은 풍경을 언제나 선사해 줬다.
모든 친구들이 자동차로 움직인다고 했을 때도,
난 반나절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즐거움을 놓칠 수 없어,
혼자 기차를 타고 간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같이 자동차를 타긴 했어도...
어쨌든 새로운 시대에 모두가 들떠있던 그 시절,
다시 오지 않을 1900년대의 우리 젊은 날, 지금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보자며,
그렇게 동해 바다로 떠났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뭘 해도 즐거웠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근처의 해변가와 횟집을 전전하며 맛난 음식과 술을 먹었고,
숙소로 잡은 콘도에서는 포커, 고스톱 등 친목 도모와술값 내기를 위한 게임도 여행 내내 했던 것 같다.
몇 번은 콘도 내 놀러온 또래의 여자 여행객들과의 조우나 합석을 시도하긴 했지만,
영화에서와 같은 그런 뜻밖의 만남이나 해프닝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냥 주구장창 며칠동안 술만 미친듯이 마셨다.
뭐 젊은 사내들끼리의 여행이 다 그렇지 머...
마지막날 밤, 우린 뭔가 모를 아쉬움으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부실해진 안주 때문이였는지,
아니면 슬슬 떨어진 체력 때문이였는지,
모두들 금새 취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꺼지지 않는 젊음의 객기로, 이 시간 함께 하지 않는 건 "배신"이라며
이미 취해 뻗어자는 놈들을 깨우고 달래어술을 먹었고,
깨운 놈은 또 자고, 깨워서 일어난 놈들은 술먹다 또 그놈들을 깨우고...
이건 뭐 무한으로 돌고 도는 옛 개그 프로의 한 장면처럼,
희미한 햇살이 창문가로 들어오던 아침까지 부어라 마셔라 끝도 없이 술판을 벌였다.
그리고 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내 평생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술병'이 나버렸다.
다들 '술병'의 기억들은 한 두개쯤 가지고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물만 마셔도 속이 뒤집혀, 화장실로 뛰어가 모든 것을 다시 뱉어내어야만 했다.
그리고 콘도를 체크아웃하는 그 순간까지 이 괴로운 시간은 계속되었고,
그리 쉽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떠나기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설악산 문턱이라도 가보고 서울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난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속도 안좋은데다가 온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설악산은 물론이고 서울로 돌아가는 몇시간, 아니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를 시간 동안
좁은 차안에서 구토를 참으며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난 그냥 하루 여기에 더 있을께"
친구들은 나를 애처롭게 바라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난 괜찮으니, 내 걱정은 말고... 혹시 모르니 남은 돈이나 좀 모아서 줘. 서울가서 줄께."
난 부득이 같이 남아있겠다던 친구들을 만류했다.
"그래, 푹쉬고... 이따 저녁에 속 괜찮아 지면 뭣 좀 사먹어.."
친구들은 술깨는 약과 각자 모은 돈을 내 손에 쥐어주고
나를 강릉역에 내려준 뒤, 설악산으로 출발했다.
난 근처 가장 가까운 곳에 보이는 여인숙을 찾았다.
그 때의 여인숙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허름한 건물에,
한 두사람 누우면 꽉차는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쾌쾌하고도 꿈꿈한 냄새까지 나는 오래된 곳이였지만,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던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 사장님께, 가격을 물어보고 바로 돈을 건넸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씬? 예쁜 아가씨 있는데..."
그래...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땐 여관이나 여인숙에 묵는 남자 손님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던,
속칭 '여관바리'로 불리우던 여인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여관주인이 손님과 중개해 주는 호객 행위를 했는데,
내게도 그 의사를 물은 것이다.
"아뇨~! 됐어요!"
만사가 귀찮다는듯 사장님께 대답을 툭 내뱉고 방문을 닫았다.
요와 이불을 까는둥 마는둥 대충 펼쳐놓은 뒤, 난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난 꿈을 꾸었다.
숨가쁜 입김을 연신 뿜어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을 힘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던 내게,
저 멀리 어디선가 한 여인이 손짓을 한다.
난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에게 다가섰고,
이내 그녀 품에 쓰러져 버렸다.
힘없는 내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던 여인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너무 걱정말라고, 모든게 잘될꺼라고 그렇게 미소 짓는다.
난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도 날 꼭 안았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부둥켜 안고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팔다리는 하나 둘씩
흉칙하게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난 너무나도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
배신이다.
그건 꿈이 아니였다.
내 옆엔 정체모를 반나체의 여인이 누워 있었고,
그녀의 다리는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난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라게 되면,
그 어떤 비명이나 외침도 지르지 못하고
바보처럼 멍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이때 알았다.
"어어어어~~ 어어~"
난 동물적 본능으로 마치 성난 괴수가 된 것 처럼 소리 지르며,
두손 두발 모두를 미친 듯이 푸닥거려 좁은 방구석 끝으로 몸을 옮겼다.
식은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움직일 수가 없다.
'저 여인은 누구지?'
'왜 내 방에 들어와 있는거지?'
'다리는 왜 떨어진 거지?'
'왜 피는 안나는 거지?'
내 몸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혹시 꿈이지 않을까 몇번이고 눈꺼풀도 비벼댔다.
그리고 용기내어 말을 꺼냈다.
"누..누..구..세..요?"
입술이 떨려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까 여관주인이 내게 흥정하던, '여관바리' 중 한 사람이였고,
한쪽 다리가 없어 의족을 한 여인이였다.
그녀는,
여관주인이 내 방 번호를 알려줬다 한다.
그래서 들어왔고 나에게 인사을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내 옆에 누웠고 날 깨우려 어깨와 등을 두드렸는데,
내가 그녀를 무의식 중에 꼭 안은 것이였다.
여관주인이 왜 내 방번호를 그녀에게 말했는지,
그게 실수였는지 아님 고도의 영업 전략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와 잠자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끔찍한 상황을 만든 여관주인에게 따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녀는 두 팔로 힘껏 내 종아리를 꼭 껴안았다.
"다리가 하나인 여자와 해본적 없잖아요?"
난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설득하려 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녀의 눈엔 절실함이 있었다.
'이 여인이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했을까...'
알수 없는 측은함과 동정심이 밀려왔고,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난 자리에 잠시 앉았고, 그녀도 부끄러웠는지 이내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녀는 어린 아들이 있는 젊은 엄마였다.
남편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앓던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다친 다리를 치료하지 않아 이리 되었다고도 했다.
이런 몸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도 했다.
나도 어떻게 여기 강릉에 왔는지,
그리고 왜 여인숙에 혼자 묵게 되었는지 말해줬다.
그리고 무슨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선택과 결정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녀에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난 선택할 일이 없어요"
그녀의 인생에선 그녀가 어떻게 할 방법없이 모든게 결정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려줬다.
"어이~ 반쪽!"
어색한 정적이 방안을 맴돌 때 쯤, 밖에서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반쪽'으로 불리는 듯 했다. 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반쪽 어딨어? 어?"
그녀는 주섬주섬 작은 가방을 챙기고 조금은 힘겹게 일어선다.
난 친구들에게 받은 돈을 건넸다. 이 돈이 충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하는 깊은 생각은 못했다.
그래도 꽤 오랜시간동안 같이 있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는 만원짜리 한장만 빼들었다.
그리고는 멋적은 미소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그녀가 떠난 방안에서
난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에 한참을 흐느꼈다.
난 온전한 몸을 가졌었지만, 그녀보다 못한 '반쪽'짜리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지만,
가끔 강릉에 놀러 갈때면,
내 젊은 날, 큰 울림을 전달해 줬던 그녀가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바래본다.
그녀도 이젠 선택하며 사는 삶을 살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