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하지 마라!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이전 화에서 계속)
'하...'
온몸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진다.
가증스런 그 놈들의 얼굴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겪어보지 못한 세상 가장 센 짜증에 온 몸이 감전 된 듯 찌릿찌릿하다.
'안한다 했잖아! X팔. 아프다하고 오지 말자고 했잖아! X팔!!!'
나에게 거친 욕들을 폭포수처럼 뱉어내며, 자책한다.
커피숍 안 시계를 바라본다. 이미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었다.
두 발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동동 떨리고, 정신은 점점 혼미해져만 간다.
'정신을 차리자! 이제와 나까지 도망갈 순 없잖나.'
'그래! 그냥 함을 지고 신부집으로 곧장 들어가자. 모두 이해하겠지'
늘어진 함을 어깨에 다시 추스려 매고, 커피숍을 나섰다.
제법 어둑해진 거리에 바람까지 심상찮다.
춥다. 내맘도 영하로 뚝 떨어진것만 같다.
신부의 집은 커피숍과 그리 멀지 않은 곳, 소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의 꼭대기 층이였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흠칫흠칫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다.
목젓이 짓눌려지도록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재촉한다.
머리속엔 온통 '빨리 끝내자'라는 말이 왱왱 거렸다.
문득 한손에 든 쇼핑백속, 오징어 다리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그래도 어머님이 정성스레 챙겨주신 건데...'
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오징어 가면을 썼다.
신랑 아버님, 친구들 그리고 선후배들...
나에게 함진아비의 길을 알려준 그 모두가 나를 향해 이렇게 소리친다.
'쫄지 마라~!'
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나, 그리고 그 심리상태가이해 되지 않는다.
도데체 내가 왜 그랬을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고 어디선가 환청과 같은 메이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래! 소리나 한번 질러보자! 까짓꺼~!'
오징어 가면은 내게 그동안 숨겨왔던 뭔가 알수 없는 용기와 능력을 주고 있는게 분명했다.
마치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나,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 처럼.
"함 사세요~!"
소심하게 아파트 꼭대기를 보며 소리쳐 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함~~~ 사세요~!!!!! 켁켁"
이번엔 배에 힘을 주고 좀 더 목을 쥐어짜 크게 힘껏 한번 질러본다.
두 세번의 외침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난 근거없는 의욕이 충만해 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저만치에서 신기한 듯, 날 쳐다보고 있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 걸어갔다.
"아저씨, XX호 인터폰 좀요."
"여보세요? 함사세요!"
누군가 인터폰을 받자, 간단히 할 말만 전하고 끊었다. 그리곤 다시 아파트 밖으로 나와 기다렸다.
내 온 신경은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쏠려 있었지만,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난 신부 집 베란다 창문이 분주히 열리고 닫힌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내 입가 한 구석엔 이미 작은 미소가 살짝 번지고 있었다.
잠시 후, 뭔가 앞쪽 엘레베이터에서부터 시끌벅쩍한 기운이 느껴졌고, 드디어 신부 측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왠지 모르게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신부 측 사람들이 등장했다. 근데 난 내 두눈을 의심했다.
저기 멀리서 급하게 뛰어나오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술상을 든 나이어린 여자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녀들은 고등학교 2학년 신부의 친구들이였고, 나 처럼 도우려 온 것이였다. 고작 2살 터울의 또래였지만, 대학생이였던 나에게 그녀들은 너무나도 어리게만 느껴졌다.
숨을 헉헉거리며 뛰어온 그녀들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였다.
앳된 얼굴 위에 바른 짙은 화장은 귀신 같았고
누가봐도 급조하여 꾸민 머리 모양은 마치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낸 듯 어색했다.
게다가 한 친구는 '중전마마~'를 외쳐야 할 것 같은 화려한 한복을,
한 친구는 반짝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눈부신 캬바레 드레스를,
나머지 한 명은 정말 귀찮아 아무 신경 안쓴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건 뭐, 컨셉도 없고... 통일도 안되고...'
난 웃음을 꾹 참았다. 왠지 여기서 웃으면 지는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도 아마 단전으로부터 솓구치는 웃음을 계속 참았으리라...
갑작스런 상황에 서로 어색한 눈을 맞추다, 왠지 리더일 것 같은 한복 입은 친구가 '오래 기다렸냐'며, '미안하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도 술상을 내려놓고 나보고 앉으라 한다. 그리고, 연일 '오빠~ 오빠~'의 치트키를 남발한다. 경직되어 있는 내 얼굴은 온화해지고 내 맘도 봄 바람에 눈녹듯 사르르 말랑말랑해지려 한다.
'오빠~ 오빠~'는 견딜 수 없지...
그녀들은 마치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 같이 몇 번의 술과 안주를 번갈아 가며 내게 권했고, 이내 곧 신부 집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난 꽤나 이런 이벤트에 익숙한, 닳고 닳은 전문가 처럼, 손사래를 치며 '뭔가 더 없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하하 호호' 나름의 이야기들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덕담을 주고 받듯 가벼운 칭찬과 실랑이가 계속될 무렵, 갑자기 그녀들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돌변했다. 두 여인은 내 양쪽 팔을 붙잡아 팔짱을 끼고, 나머지 한 명은 뒤에서 날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제 그만 신부 집으로 들어가자면서...
난 본능적으로 반항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들어가더라도 여린 여자 세명에 끌려가는 모양새는 아니지..'
'그래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은 버거웠지만 그럭저럭 난 버틸수 있었고, 양측 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 때쯤, 신부 측 남자가 합세하여 그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앞쪽 와이셔츠, 아니 멱살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위치의 가슴 팍을 잡고 끌기 시작한다.
"이 X끼야 이제 그만 가자!"
난 빈정이 상했다. 아니 사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니, 내가 여기 온지 얼마 되었다고 저러나?'
'그리고. 반말은, 욕은 왜 하는데?'
온갖 짜증과 화를 낼 틈도 없었다. 왜냐하면 남자의 힘이 더해지니 이내 점점 끌려가기 시작했고, 이를 온 몸으로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점점 맥아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난 '이제 모든게 끝'이라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두 손이 내 어깨를 감쌌고, 나를 힘껏 잡아 당긴다.
"아니 함진아비에게 욕을 왜 합니까!!"
난 뒤를 돌아 보았다.
그의 미소는 마치 예수님, 아니 부처님, 아니 천사 보다 멋지고 은혜로왔으며,
'고생했다며 이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 그렇게 인자한 눈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누구~~~?"
"친구야, 친구~!"
그래! 기억났다. 신랑 그녀석이 아까 커피숍에서 도와줄 친구를 찾아보겠다 하지 않았나!
난 눈물이 찔끔났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듯 했다.
'난 이제 외롭지 않다!'
'기대해라 이것들아~! 이제 부터가 진짜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머쓱해진 신부 측을 상대로 능수능란하게 흥정을 이어갔다.
술상도 새로 가지고 오라 했다.
신부 친구들 노래도 시켰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돈봉투를 바닥에 깔라고 했다.
가끔씩 돈봉투를 살펴보고는,
신랑을 무시하냐며 더 넣으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제법 모인 주변 이웃들도 친구의 넉살에 덩달아 웃고 떠들고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 모두는 그의 팬이 된 듯 했다.
마지막 힘겨운 몸싸움은 1층 엘레베이터에서 시작되었다.
우린 어떻게든 한걸음 마다 돈을 받을 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고, 신부 측은 엘레베이터를 태우려 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팽팽했던 몸싸움은 신부 측 마지막 봉투로 끝이 났다.
친구는 봉투를 열어보더니, 흐믓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고, 우린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끝이다~! 우리가 해냈다!'
난 모든게 뿌듯했다. 아까 그냥 혼자 함을 메고 집으로 바로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이렇게 멋진 일을 해낸 내 자신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다리는 힘이 풀려 곧 주저앉을 것만 같았지만, 전투에서 이긴 장수처럼 뭔가 모를 자부심과 희열감이 극에 달해갔다.
신부 어머님께 함을 전해 드리고, 아버님께도 인사했다. 모두들 수고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리거나 악수를 청했다. 모든 것이 용서되는 순간이였다. 돌변했던 신부 친구들도, 아까 들었던 기분 나쁜 욕도 잊었다. 오늘 오지 않은 친구들을 향한 미움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랑 그녀석이 다가왔다. 우린 몇십년만에 재회한 이산가족처럼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정강이에서부터 올라오는 벅찬 감동과 뭉클함이 폭발하기 직전이였다.
"수고했어! 진짜 진짜 고생했다!"
"아냐. 니 친구가 너무 고생했어"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그 모든 역경과 고난을 함께한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니 친구 아냐???"
......
배신이다.
그는 그날 함값으로 받은 모든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누구의 친구도 아니였다.
그가 '함짓날 봉투 전문 털이범'이였는진 알순 없지만,
어쨌든 친구와 난 그날의 일을 함구하기로 했다.
그 이후, 가끔 함 들어오는 풍경을 보게 될 때면,
유심히 흥정꾼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고, 나 혼자 피식거리곤 했다.
방심하지마라, 이유없는 과잉친절이란 없다.
그리고.. 적은 항상 가장 가까운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