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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nue Dec 23. 2021

초보 함진아비(1) :
배신, 넷

그래 외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

배신, 넷 :

지금은 연락이 끊긴지 꽤 오래된 친구 녀석이 하나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 이전부터 알던 친구이니,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나와 제일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다. 희미하게 나마 남아있는 머릿 속 기억을 쥐어 짜내어 보니, 아마도 그 녀석과 난 같은 동네 살던 '동네 친구'로 처음 만났던 것도 같다.


그 녀석과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같은 동네으로부터 떨어져 각자 이사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연은 꽤 오래 지속되었고, 난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잊을만하면 뜬금없이 그 녀석으로부터 연락이 왔으니...


그 녀석은 말썽꾸러기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문제아'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로 어릴적부터 파출소, 경찰서를 꽤 들락거렸고, 중학교 때였는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을 했었다. 꽤 큰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계속 말썽을 피울꺼면 학교 그만두고 공장에 와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단다. 하지만, 내 기억엔 그의 공장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녀석과의 만남은 내겐 작은 일탈과도 같았다. 나에게 펼쳐놓는평범한 중/고등학생이 경험하지 못할 그의 신기한 무용담들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후미진 골목에서 세상 모든 고뇌를 다 가진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는 그를볼 때면 뭔가 멋져 보이기 까지 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녀석으로 부터 오는 연락을 점점 피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과의 공통 관심사가 하나둘씩 없어지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멋져보였던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어느새부턴가 불편함이 되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 추웠던 어느 봄날,

대학입학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그때,

갑자기 그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나... 결혼해."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때의 우린 만 스무살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였고, 신부의 나이는 우리보다 2살 더 어린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의 아이를 임신 중이였다.


그런데 일명 '속도 위반'이였던 그의 결혼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그가 평생 처음으로 내게 한 부탁 때문이였다.


"니가 함을 좀 가져다 줬으면 해. 부탁할 사람이 별로 없어."


그 녀석은 이제껏 봐왔던 모습과는 달랐다. 

진지했고, 진심이였다.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 생겼으니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일생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도움을 청할 친구가 별로 없어'라는 그의 말에 약간의 측은함도 들었다. 어쨌든, 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혼 전 신랑 측에서 혼수의 예물을 함에 담아 신부에게 보내던 '함'의 전통은 이젠 그저 책이나 오래된 사진에서나 볼법한, 사라진 옛날의 추억과 같은 것이 되었지만, 그때는 시끌벅적하게 "함 사시오!"를 부르던 풍경은 일상의 또다른 즐거움이였다.


신랑과 신부 측 간의 팽팽한 신경전, 실랑이와 몸싸움. 지켜보는 동네 이웃과 구경꾼. 그리고 각자 한마디씩 던지는 저마다의 훈수... 층간 소음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뉴스가 더이상 새롭지 않은 요즘, 그저 사람냄새가 나는 시끄러움... 그리운 그시절이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보다 모든게 경직되고 엄격했던 그때 그시절엔, 미성년 결혼도, 혼전 임신도 흉이라 생각하여 쉬쉬하며 조용히 혼례를 치루는게 일반적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온 동네 결혼한다고 떠드는 행사인 '함'이라니, 그 당시 나는 당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근데 도데체 함은 왜 하자고 하는거야...'


후일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집안의 아버님 모두 굉장히 호쾌한 같은 경상도 사나이셨고 일명 죽이 잘 맞으셨다고 한다. 또한 친구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는데, 며느리가 임신까지 했다니 나름 이건 '복덩이'라며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양가 모두 이건 하늘이 맺어준 '경사'라며 오히려 좋아하셨다 한다.


어쨌든.. 난 두 집안의 경사이자 중요한 이벤트인 친구의 함짓날을 책임져야 한다. 머리부터 내려오는 부담감이 가슴을 찌릿하게 짓누른다. 게다가 급히 서두르는 결혼인 만큼 준비할 시간도 빠듯하다.


우선 그날 거사를 함께 할 몇 안되는 그녀석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처음보는 사이라 서먹서먹 한데다가 다들 하기싫은 오랜 숙제를 하듯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 하다.

우린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주변 친인척 결혼식을 떠올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장면을 서로 이야기해 본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보다 아는 지식이 별로 없다.


친구는 그냥 부담 갖지 말고 함만 들고 신부 집으로 바로 들어와도 된다고 한다. 막상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 하니, 뭔가 쓸데없는 자존심이 머리 속을 간지럽힌다.


"에이 또 그건 아니지..." "맞아, 그럼 안돼지.. 그럼그럼.."


그래도 우리끼리는 답이 없었고 아이디어도 부족했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꽤 길게 느껴졌을 무렵, 이대로는 끝도 없을것 같아, 우선 그날의 역할을 정해보기로 했다. 총 3명이니 역할이랄 것도 없었다. 함진아비, 그리고 흥정할 사람, 함진아비를 도와 함을 지키고 힘을 쓸 사람.


친구는 나에게 '함진아비'가 되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친구는 자신의 함을 지켜줄 흔들리지 않는 수호천사로 일찌감치 키가 큰 나를 낙점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원래 함진아비는 결혼한 사람 중에, 아들을 낳은 친구가 해야 한단다. 아니, 그럼 친구들 중 첫번째로 결혼하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어디서 아들 낳은 사람을 빌려라도 와야한단 말인가?


우린 젊은 혈기로넘쳐나는 자신감 때문이였었는지, 아님 답도 없는 기나긴 탁상공론에 지쳤었는지, 각자 주변 사람들에게 어찌하면 되는지 열심히 알아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래, 뭐 어찌되겠지... 난 뭐 열심히 힘만 쓰면 되는거잖아.'


...


그리고, 바로 그 날이 왔다.




난 사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었다. 중간엔 친구에게 연락하여 못하겠다고 이야기할까하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 하면 함진아비 역할을 잘 할까?'라는 생각보다 '어찌하면 참석하지 않아도 친구가 원망하지 않을까?'라는 그럴듯한 거짓말 만을 찾았다.


'아프다고 할까?'


하지만, 그 녀석의 간절함이 눈앞에 아른거려 그럴 수 없었다. 난 할 수없이 친구며 선배며 주변에 아는 지인들 모두에게 오늘의 이 난관을 어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나름의 심리적 안정도 찾기 시작했다. 함짓날과 함진아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물어보는 사람마다 그 정의도, 행동하는 바도 희한하리만큼 조금씩 모두가 틀렸다.


누구는 함은 절대로 땅에 놓으면 안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함진아비와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고도 했다. 신부 측과의 '함값' 흥정과 관련해서는 저마다 보고 듣고 경험한게 모두가 달랐고, 각자의 크고 작은 과장을 더해 부풀렸으며, 신뢰가 전혀 가지 않는 노하우 같은 것들도 늘어 놓았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내게 당부했던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쫄지 말라"는 것이였다. 분명 신부측에서는 함진아비의어린 나이를 공략하여, 심하게 압박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드신 분이 와서 회유하거나 윽박질러도, 함진아비는 중심을 잘 지키면 된다라고 했다.


함을 가운데 두고 시작되는 신부 측과의 기싸움은 바로 결혼 생활의 전초전과도 같다며, 여기서부터 기세를 꽉 잡아야 집안이 평안하고 문제가 없다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 나오는 어이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신경전이 존재 했으리라.


암튼, 난 대학 입학선물로 부모님이 사주신 새양복과 넥타이를 챙겨입고, 친구의 집으로 항했다. 친구 어머님께서 준비해 주신 오징어가면과 청사초롱도 쇼핑백에 넣었다. 거울에 언뜻보이는 나를 훔쳐보니 나름 꽤 '함진아비'스럽다. 인사드리고 나가려는데, 아버님이 부르신다. 두둑한 돈봉투를 내 옆구리로 찔러주시고 어깨를 툭툭치면서 말씀하신다.


"어깨 펴고~!, 쪼리면 안된데이~! 남자아가 쪽팔리면 안된데이~!"

어머님은 연신 아버님의 양팔을 가볍게 두드리시며, 왜 그러냐고, 애들이 뭘 알겠냐며 핀잔을 주셨지만, 난 아버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님은 아들 친구들이 무시받는게 싫으셨을 게다. 그건 곧 신랑과 신랑 집안의 체면과도 연결되는 것일 테니.. 


'그래 쫄지 말자, 함만 잘 지키자'


부모님의 격한 격려와 화이팅을 뒤로하며, 친구와 난 택시를 타고 신부의 집 근처 커피숍에 도착했다. 이제 나머지 친구들만 기다리면 된다. 친구와 나는 자연스럽게 예전부터 함께한 추억들을 서로 꺼내놓기 시작했고, 가끔은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배꼽잡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였다.


얼마 동안인지 그렇게 옛날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주고받다 보니, 밖은 어느새 천천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그건 곧 함짓날 행사의 시작을 재촉하는 표시였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흥정과 함진아비를 도와줄 친구들이 늦는다.

벌써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고 있다. 집으로 모두 연락해 봤는데, 여기에 온다고 나간지 한참되었단다.


친구도 나도 불안했다.

친구는 혹시 모르니 몇몇 도와줄 친구를 급하게 섭외해 보겠다고 하며, 신부의 집으로 먼저 출발했다.

커피숍의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쌓여갔다. 난 초초했다. 혼자일까 두려웠다.


그리고.. 결국 그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배신이다. 'X같은 놈들... 나 혼자 어쩌라고...'


(다음 화에 계속)

https://brunch.co.kr/@bynu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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