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계획이 항상 해피엔딩이 되는건 아니다
얼마전, 친한 여자후배와 수다를 떨다가,
또다른 여자후배의 근황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해외생활을 오래한, 그 여자후배는 멋진 브라질 가이와 연애 중이였는데, 알콩달콩한 그녀의 연애 이야기를 듣다보니,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가 궁금해 졌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만났는데?"
"어플로요.."
내가 꼰대라서 그런건지, 아님 변화되는 세상에 적응되지 못하는 아싸라서 그런건지 몰라도,
참 촌스럽게도 난,
"우와~! 진짜? 정말 대단한데~!" 이랬더랬다.
아... 좀더 시크하고 쿨한 척 할껄.. 흑..
암튼 난, 온라인으로 알게된 이성을 또다른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 하다.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예전 싸이월드 시절도 그랬고, 페이스북 시절도 그랬고, 요즘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틱톡도 마찬가지 같은데...
뭔가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멋진 가짜가 허접한 진짜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이랄까.. 아니면, 슬프지만 진짜 나는 늙은 꼰대라서 그러할 수도..
이렇게 신박한 요즘의 연애 생활에 대해 듣고 있자니,
예전 '레트로'스럽던 내 소개팅의 추억 한가닥이 문득 생각났다.
2009년 가을 즈음, 나는 외로운 솔로 생활을 벗어나고파, 오랫만에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당사자인 여자분의이름이 무엇이였는지, 어떤 일을 하는 분이였는지, 나이와 생김새, 옷차림, 말투 등 그 모든 것들이, 거짓말 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2009년이라는 특정 년도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잊을 수 없는 소개팅 장소 때문에 그러하다.
호림아트센터 신사분관.
이곳은 2009년도에 오픈한 압구정동 한복판에 세워진 박물관인데, 오픈하고 얼마안되서 소개팅을 했으니, 2009년 가을즈음이 확실할거다...
그때는 소개팅 장소나 그날 하루의 스케줄을 잡는건 대부분 남자의 몫이였는데, 크게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루틴이였던 것 같다. 다들 분위가 좋은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고, 맘에 들면 밥을 먹거나 술한잔 하기도 하는...
무슨 이유였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오랫만에 하는 소개팅을 다들 익숙한 그저그러한 장소에서, 뻔하디 뻔한 스케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뭔가 멋지고 흥미로와서 첫인상 점수도 좀 두둑히 따고 싶었고, 좋은 인연이 되어서 내 오랜 솔로 생활을 빨리 청산했으면 하는 맘이 컸었던 것 같다.
'그래. 계획을 짜보자..'
'어떻게 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지고 로맨틱한 소개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장소가 좌중을 압도할 정도로 특이해야 한다. 과연 어디가 좋을까?'
난 오랜 고민 끝에 얼마전 오픈한 박물관을 떠올렸다.
'그래! 예술과 전시, 뭔가 있어보이잖아? 기품있고 세련되어 보이고!'
박물관으로 장소가 정해지니 그 다음부터는 아이디어가 마치 장마철 소나기처럼 미친듯이 쏟아진다.
'만나는 방법은 어떻게 할까?'
'이곳은 3개층으로된 전시실이 있으니,
나는 위에서부터 그녀는 아래서부터 서로 천천히 전시를 구경하고, 중간층에서 만나는게 어떨까?'
'와 이건 진짜 멋지다!'
'위층, 그리고 아래층에서 전시를 돌아보고, 중간층에 들어서면서부터 서로는 아마 긴장하고 설레겠지?'
벌써부터 머리 속에 펼쳐진 서로의 모습에 혼자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아.. 근데 약간 뭔가 부족하다. 보다 극적일 수는 없을까?'
'그래! 서로의 외모에 대한 정보 공유를 최소화 하자! 서로 잘 몰라야 한다! 그럼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이 아닐까? 하며 좀더 긴장하지 않을까?'
'근데..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아.. 이건 또 스트레스인데..'
'사람이 거의 빠져나가는 시간에 맞춰서 만나자, 그럼 되잖아!'
'전시관이 6시에 문을 닫으니, 5시 30분이면 사람도 좀 한적하고 괜찮겠네!'
난 나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그리고 주선자에게 이 아름다운 계획을 전달한다.
주선자는 이런 소개팅은 처음이라면서 나보고 멋지단다. 난 또 한껏 우쭐해 진다.
상대방 그녀도 특이하고 너무나도 재미있을것 같다고 했단다. 하하
벌써부터 난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준거다.
실패는 없다.
이미 계획은 소스라치게 놀랄만큼 완벽하니까!
소개팅 당일,
나름대로의 멋진 코디를 마친 나는,
4시반경,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사람이 북적일줄 알았던 박물관은 의외로 한산하다.
그래 좋은 징조다. 이정도면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4층으로 올라간다. 천천히 전시장들을 둘러본다.
하지만 나의 모든 신경은 시간에 맞춰져 있다.
'지금 몇시지?' 이럴땐 왜 항상 시간이 무겁게 가는 건지, 아직 30분이나 남아있다.
그래. 맘의 여유를 찾자. 모든 일은 서두르다 망치는 거다. 조금만 참자.
난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같은 전시물만 몇십분째 쳐다보고 있다.
드디어 약속한 5시 반이 다가왔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층을 한계단 한계단 내려간다.
나도 모르게 3층에 다다렀을땐 눈이 지그시 감겨졌다.
약속의 5시 반, 난 그렇게 3층 전시실 입구 앞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이 거의 없다. 아니, 보이질 않는다. 모두 어디로 간걸까? 아마 폐관시간이 가까워 지니 모두 밖으로 나간 것일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자. 3층도 꽤 넓은 전시실 아닌가?
난 천천히 전시실 안으로 발길을 옮기고,
많진 않지만, 관람객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과연 그녀는 누구일까?
눈이 바빠진다. 혹시 놓칠새라 한번 봤던 곳도 두세번씩 체크하고, 다시 또 뒤돌아 보곤한다.
이제 막 코너를 돌아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려는 그순간,
온세상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다 멈춰서고...
마법처럼 그녀의 뒷모습이 내 두눈 안으로 들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생기넘치는 아름다운 머리,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트렌치 코트,
'그래, 그녀다!' 나는 확신했다.
아까부터 울리던 핸드폰을 강제로 끄고,
난 그녀에게 다가간다. 심장이 터질듯이 쿵쾅거린다.
"저, 저기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나를 향해 뒤돌아 서는 그녀...
그게 샴푸향이였는지, 아님 향수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머리끝에서 코끝을 매만지는, 그렇게 아름다운 향기는 태어나서 처음인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긴 생머리, 크고 예쁜 두눈을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난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 앞에 펼쳐질 수많은 일들을 상상을 한다.
우리의 첫데이트, 우리의 첫 여행, 우리의 첫 키스...
함께 웃고, 즐거워 하고, 사랑하는....
"네? 왜 그러시는데요?"
정적을 깨고, 그녀가 나에게 말을 한다.
"네, 오늘 소개팅..."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난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다.
가슴이 계속 쿵쾅거리지만, 어쩔수 없다. 그녀가 아니잖나.
그녀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간단한 목례를 하며, 사라져 간다.
...
정신을 차리고, 아까부터 울리던 핸드폰을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제가 늦게 도착했는데,
폐관 1시간전에는 못들어가게 해서,
지금 못들어가고 밖에 있거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배신이다.
좀 시간 맞춰서 올수는 없었니? 응?
난 박물관을 갈 때마다, 날 향해 웃음지었던 이름모를 그녀가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씩,
혹시 그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