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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nue Dec 06. 2021

크리스마스엔, 피아노 금지 :
배신, 둘

함부로 피아노 치지 마라

아주 오래전, 이젠 몇년도인지 기억조차 희미한 예전 그때,

사귄지 이제 얼마 안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키가 크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환한 미소와 약간은 어눌한 말투가 좀 특이했던,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 봤을 예쁜 아이였다.


그 친구를 소개 받게 된것도 인연이 참 특이했는데,

원래 소개팅으로 만날려고 했던 여자아이가 그날 소개팅을 펑크 냈고,

나에게 미안했던 내 친구가 자기 여자친구의 언니를 부른거다.

 

친구는 언니가 마음에 들면, 그 소개팅은 없었던 걸루 하자며,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어찌되었건 희한한 인연속에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우린 곧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크리스 마스는 남자에게 있어서 정말 큰 스트레스이며, 일년의 마지막을 여자친구에게 검증받는 그런 날이였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와 성과에 따라 그 해의 나의 이미지가 결정 되고 이는 또 그 다음해 연애의 안녕과 평안을 담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이날을 위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한다. 나 또한 예외가 될수 없다.

뭔가를 준비 해야 한다. 게다가 우린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지 않았는가?


그녀는 피아니스트 였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였다.

상상해 보라. 얼굴 예쁘고 키도 크고,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인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란...


불행하게도 난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만남이 그리 길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그녀는 자기가 가진 단 한가지 재능을 나에게 쉽게 보여주기 싫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뭔 이런 개뿔딱지 같은 소리가 있나 싶지만, 그땐 눈먼 중생이였기에 그 조차도 뭔가 시크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난 크리스 마스 이벤트를 고민중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 


우선 기본적으로 저녁을 근사한 곳에서 먹고, 와인한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남에 위치한 빌딩 꼭대기의 카페. 그래 바로 이곳이다. 게다가 사장형과는 친분도 있다.

여기서 그녀와 멋진 와인 한잔을 하면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끽할것이다!


카페는 빌딩 꼭대기에 있었고, 복층형태로 되어 있는 구조이다. 아래층은 대부분 식사를 하는 공간이고, 2층은 올라가서 테라스 형식으로 아래층을 볼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상당히 크고 천장도 높은, 강남에서 꽤 유명한 카페이다.


그녀를 데리고 카페로 들어간다. 역시 크리스마스 이브라 사람들이 즐비하다.

늦은 시간에도 어디서 굴러나왔는지 바퀴벌레같은 남녀가 꼭꼭 차있다. 


우린 2층에 자리 잡았다.

2층에서 보이는 강남의 야경은 정말 일품이다. 그녀도 만족해 하는 눈치다.

능숙하게 와인과 치즈를 시키고 그녀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래 성공이야. 이정도면 대단해.'

나혼자만의 성공에 도취되에 있을즈음 뭔가 아쉬운 듯한 여운이 남는다. 


'근데 뭔가 아쉬워.. 이정도는 다들 하잖아... 뭔가 결정타가 필요해.'


1층에 비어있는 피아노를 발견한다. 그래.. 그녀는 피아니스트였지.

그녀는 내게 피아노를 연주해 줄 수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미숙한 내가 피아노를 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면 어떨까?


난 역시 똑똑하다. 이것만큼 좋은 아이디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난 독학으로 피아노도 어느정도 친다.


난 나의 번뜩이는 재치에 감탄한다. 


그녀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멀리 강남의 야경을 바라보는 틈을 타 아래층으로 몰래 내려간다. 그리고 사장형에게 승락을 얻는다. 


자... 이제 시작이다.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걸어나간다. 자리에 앉으니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녀도 아마 보고 있으리라. 

피아노 건반위에 손을 서서히 올려 놓는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 피아노를 칠 수가 없다.


여기서 일어나면 끝장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안된다. 

White Christmas! 유명한 캐롤송이다. 천천히 나의 음표와 화성을 되내이면서 천천히 부드럽게 첫마디를 시작한다. 처음엔 손가락이 떨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아노와 나는 한몸이 되어 간다. 중간즈음 되었을 때는 그녀를 바라볼 여유도 생긴다. 


그녀를 보자. 그녀도 듣고 있겠지? 


그녀는 발코니에 기대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멀리 있어서 그녀의 세세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기쁜 표정일 것이다. 누가 이런 이벤트를 할 수 있겠는가. 난 나의 용기와 아이디어에 다시끔 감탄한다. 


연주를 끝마쳤다. 이 정도면 대 성공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박수소리가 들린다. 난 역시 대단해라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걸어 나온다.

옆에 있는 남자들의 불만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안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너희들의 크리스마스를 망친건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이세상의 왕이다!" 


질투와 불만과 환호성과 부러움을 뒤로 하고, 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그래, 내가 2층으로 올라가면,

그녀는 나에게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내 품에 안기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해"

그리고 우린 외국 영화에서와 같이 입주위가 흥건해 질때까지 진한 키스를 할것이고,

내 인생의 가장 완벽한 크리스 마스는 이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떨리고 흥분된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섰다.

저기 그녀가 보인다.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 내가 생각한 상황과 비슷하다. 다시끔 내 자신에 감탄하며 그녀에게 다가선다. 


"오빠! 4번째 소절이랑 7번째 소절 틀렸어!" 

"......." 


배신이다. 


난 그 후 여자 앞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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