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선, 한영애 : 4집 - 1995
숨은 K-Pop 명곡 전체 듣기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LlxikA5wuioeKnEXE1vbD93Gr_Basdrd
너무나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가 자기의 색깔을 온전히 보여주기 시작한 그 충격적인 노래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이어폰 한쪽 저 끝에서 서서히 가슴속까지 밀려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소리에서도 빛이 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K-Pop 역사상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음색의 소유자, 유니크함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준 보석 같은 '블루스의 여왕', '소리의 마녀', 한영애.
그녀는 대학 입학을 위한 재수를 하던 시절, 친구 선배의 신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끔씩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곧 사람들에게 '희한한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소문이 퍼졌고, 1976년 명동의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노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 그녀는 작곡가 오준영에게 발탁이 되어 당시엔 흔했던 백호빈, 오종국, 한영애의 옴니버스식 앨범에 참여하면서 데뷔 아닌 데뷔를 하게 되는데 지금의 한영애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청초하고도 곱디고운 음색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 앨범에 실린 한영애의 노래 '사랑의 편지'는 이듬해 비슷한 콘셉트의 당대 최고의 여배우 정윤희의 앨범에 또다시 수록되어 발매된다.
이 시기에 당시에는 혼성 노래모임이었던 '해바라기'를 이끌던 김의철은 허스키하고도 독특한 음색이 매력적이었던 그녀를 해바라기의 멤버로 영입하기에 이르고, 건강이 악화된 그는 또 다른 K-Pop 내 포크/블루스의 레전드인 '이정선'에게 그 리더의 자리를 넘기게 되는데, 한영애는 이정선, 이주호, 이광조, 김영미 등 이름만으로도 그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거장들과 해바라기로 함께 활동하며 1977년 1집, 1979년 2집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참고로 해바라기는 2집 이후 1986년이 되어서야 마지막 3집 앨범을 발매하기에 이르는데, 이 앨범을 끝으로 4인조 혼성 그룹이었던 '해바라기'의 시대는 끝이 나고, 원년 멤버였던 이주호와 유익종이 그 이름을 이어받아 만든 남성 포크 듀오 '해바라기'의 시대가 시작된다.
해바라기로 한참 활동하던 1977년과 1978년 그녀는 자신의 솔로 앨범 2장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식 발매되지 못했고 이후 다른 음반사가 무단으로 발매한 어이없는 음반 역시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해바라기는 그녀를 음악으로 안내한 고마운 그룹이었지만, 4인조 혼성 그룹의 특성상 그녀는 자신의 개성을 한껏 낮추고 화합과 하모니에 맞춰야 했기에 자신의 뜻대로 노래할 수 없었던 가수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연극무대 제의를 받아 극단 "자유극장"에서 가수 활동을 중단한 채 오랜 시간 동안 오직 연극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녀는 “그때는 내가 갖고 있는 감성, 정서, 소리 등을 사분의 일 정도밖에 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오직 25%만 그녀 것이었던 음악
8년 동안 음악과 떨어진 삶을 살았던 그녀는 치열하게 연극배우로서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연극 안에서는 그녀의 열정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이후 이때를 회고하면서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계속 살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1985년 다시 한번 음악의 길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고 1986년 데뷔 앨범 '여울목'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무렵 밴드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공동체의 느낌이 강했던 '신촌 블루스'에도 합류하여 더 농후해진 그녀의 이야기들을 서서히 풀어내기 시작하는데, 참고로 신촌 블루스는 1986년 결성되어 1988년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그녀의 앨범은 '여울목', '건널 수 없는 강' 등이 대중에게 일부 알려지고 또 호평을 받기는 하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음악의 방향성을 100% 녹여내지 못했다고 한다.
나의 100%를 향하여~!
그녀는 2집부터는 진정 나만의 100%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으로 향후 그녀와의 긴 음악적 동반자이자 본 숨은 명곡에서도 자주 등장한 레전드 프로듀서 송홍섭을 김수철을 통해 만나게 되고,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K-Pop의 명작 중 명작인 2집 '바라본다'를 1988년 발매하게 된다.
100%를 쏟아낸 그녀의 2집은 대단했다.
그리고 또 놀라웠다.
난 앨범의 처음이었던 '누구 없소?'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고작 10대 중반의 나이였던 나에겐 어쩌면 큰 충격에 가까웠고, 온몸에 소름이 가득 들기 까지 하였다.
포크, 락, 블루스 등을 아우르는 노래들은 한영애만의 완성형에 가까워진 독특한 음색과 어울려 ‘누구 없소’, ‘코뿔소’, ‘루씰’, ‘바라본다’ 등 그 어느 곡 하나를 버릴 수 없는 명곡들을 만들어 냈고, 특히 유재하의 마지막 유작인 '비애'가 실려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50만 장이 넘는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KBS 인기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에서 온전히 1회 방영분을 한영애를 위해 편성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2집의 큰 성공을 지나 4년여 만에 나온 그녀의 3집에서는 재즈, 팝 등의 새로운 시도를 보이기도 했고, 한영애의 최초 자작곡인 '말도 안 돼'가 실리기도 했으며, 여울목을 만든 한돌이 작곡한 '조율'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영애는 앨범 발매 주기가 굉장히 긴 편에 속하는 뮤지션이기도 한데, 그녀의 4집도 3집 발매 이후 5년이란 시간이 지나 K-Pop을 대표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한결 원숙해진 음악들을 선보이게 된다.
1999년 5집 '난다 난다 난·다'에서 보여준 그녀의 실험 정신은 굉장히 파격적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음악적 배경을 탄탄하게 지탱했던 장르인 포크, 락, 블루스 등을 모두 버리고 트로트, 레게 등과 같은 새로운 장르적 결합을 신윤철, 강호정 등의 전자음악 대가의 뮤지션들과 함께 시도했다.
한영애는 음악 활동이 상대적으로 뜸했었던 2002~09년까지 EBS FM 프로의 진행을 맡았고 한국방송대상의 진행자 부문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다시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해질 무렵인 2012년, 나는 가수다 시즌 2에 출연하여 양희은, 전인권, 이문세, 밥 딜런, 보니 엠 등 가요와 팝, 폭넓은 음악 장르의 경계를 넘어 '역시 한영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녀는 2014년 대중과 함께 소통을 모토로 6집 '샤키포'를 발매하는데, 일렉트로닉 느낌이 강한 이 실험적 앨범은 그녀가 여전히 음악에 대한 마음가짐이 변함없음을 알게 해주고 있으며, 비교적 최근인 2022년에는 조동희/조동익이 함께한 투트랙 프로젝트로 디지털 싱글을 발매하여 여전히 그녀의 존재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소개할 아흔네 번째 숨은 명곡은 1995년 발매한 한영애 4집 '불어오라 바람아'에 실린 한영애 작사/이병우 작곡/송홍섭 편곡의 '가을 시선'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이소라가 2000년 리메이크하여 발매된 4집 '꽃'에 스토리(이승환)의 편곡으로 보다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노래이긴 하지만 이 노래의 원곡은 완전히 다른 제목의 이병우의 연주곡인 것을 아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 같다.
앞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영애는 4집에 들어서며 보다 싱어송라이터로의 입지를 더 크게 확고히 하는 듯한데, 이정선 작사/작곡인 '너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앨범 내 모든 곡의 작사, 그리고 3곡의 작사/작곡을 맡아 그녀가 하고자 했던 음악적 고뇌를 앨범 전체에서 느낄 수 있다.
양희은과의 공동 작업에서도 느껴졌듯이 이병우와의 조우는 이전의 한영애 보다 차분하고 서정적일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는데, 타이틀 곡이었던 '불어오라 바람아'가 반전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흔치 않은 이병우의 일렉기타 연주도 연주이지만, 예전 '어떤 날'의 향기가 짙게 풍겨 내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곡은 이병우 기타 연주곡,
꼬마 버섯의 꿈
어쨌든 이 곡은 같은 해 이병우 기타 4집에 수록된 연주곡 '꼬마 버섯의 꿈'의 기타 멜로디에 한영애가 가사를 붙인 것으로 원곡에서 느껴졌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원곡인 '꼬마 버섯의 꿈'이라는 제목과 이병우가 만든 연주곡의 의도를 완전히 버리고 굳이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는지이다.
원곡 '꼬마 버섯의 꿈'에서도 참여했던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아름다운 연주로 시작되는 노래는 재즈적 감성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멜로디라인과 한영애 본연의 허스키한 음색이 함께 어우러 지고 마치 한 편의 멋진 수필을 읽는 듯 그녀가 써 내려간 서정적이고도 담담한 가을 어느 날 시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노래는 마치 어느 가을날 만난 그리운 얼굴들, 한 때는 우리 모두의 열정을 바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그 추억을 담담하게 그리는 것만 같다.
이제 모두 손을 잡고 인사하며 헤어져야 할 그 시간, 열정하나로 치열하게 서로 치받았던 얼굴에는 보이지 않던 고운 미소가 나를 반겨 주고, 온몸이 부서질 듯 사랑했던 기억도 그리고 또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상처도 그저 투명하고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에 사라지게 되고야 마는...
이 노래를 듣다 보면 한영애는 참 좋은 작사가임을 또다시 실감하게 되는데, 툭툭 뱉어 놓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을 후비고 파,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알 수 없는 먹먹함을 만들어 내곤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죽을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복수심에 활활 타오를 가슴 아픈 일들 하나쯤은 만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감정의 기복이 더해지고는 있지만, 그 마음이 점차 더뎌지는건 그저 모든 상처의 특효약인 시간때문이라고, 늙어가는 내몸이 더이상 미워하는 에너지를 쓰기엔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확실히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세상 못된 얼굴로, 그 감정의 끝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그를 미워했던게 아니라 한없이 어리석고 바보같았던 나를 미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토록 힘들어했던 그 모든 것도 내가 사랑했던 것 일 텐데.
너무 미워하지 말자. 그만 놓아주자. 가을은 그런 계절이니...
아름다운 길 용서를 만드네,
드높은 하늘.
작사 : 한영애
작곡 : 이병우
편곡 : 송홍섭
노래 : 한영애
이제는 모두 돌아가 제자리에 앉는다
불타는 열정에 가리워졌던 고운 얼굴들이
미소를 보내는 시간
떠나간 착한 연인들 서로 안부를 묻고
다락방 전설이 끝나기 전에 그리운 손을 잡고
고맙다 인사를 하네
해는 유리 거울로 달은 그림자 너머
별은 벌거벗는 이 가슴에
깊어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평화롭게 반짝이면서 안으로 뜨네
사랑. 아름다운 길 용서를 만드네 드높은 하늘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