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루가 지나고, 쥬비 : 1집 - 2002
숨은 K-Pop 명곡 전체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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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바로 엇그제까지만 해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마치 당장 이 세상이 '푹' 땅에 꺼질 것만 같은 '우렁찬' 한숨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보이며 온갖 술주정이란 주정은 다 부리던 친구 녀석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여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줬다.
'저 놈 원래 그렇잖아, 뭘 그리 놀라'
한참을 어이없어하던 내게, 친구들은 어깨를 툭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고, 난 새삼 새로운 사랑에 빠져 하염없이 꿀 떨어지는 사랑의 눈빛으로 여자친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가 굉장히 부러웠다.
유명한 결혼정보회사인 듀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녀가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 1위로는 ‘시간이 약’ (20.2%)이라는 답변이 올랐고, 2위는 ‘일과 학업에 집중한다’(17.4%), 3위는 ‘다른 이성을 만난다’ (15.3%)가, 4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14.3%)였다. ‘연인을 잊기 위해 따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9.9%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녀석이 가지는 실연의 아픔은 그 누구보다도 컸던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별 후 그렇게 슬퍼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그 아픔을 극복하는 자신의 방법을 찾은 듯 했고, 그게 바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일 게다.
짜식, 참 부럽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를 향한 나의 부러움은 그가 여자친구를 새로 사귀여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실연에 대한 그의 번개와도 같은 빠른 회복력이 부러웠던 게다.
특히 나는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좀처럼 내색하지 않지만, 온몸 구석구석에 깊게 파인 상처들이 아물기까지 오랜 시간을 감내하며 혼자 참아내야 하는 태생적 불치병을 가지고 살고 있었고 얼마 전 여자친구와의 이별이 아주 오랜 감기처럼 좀처럼 가시지 않았기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아프기만 했던 우리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치유가 되어가는 어느 하루를 덤덤히 노래하는, 2002년 발표된 쥬비(Jubi) 1집에 수록된 배영준 작사, 조수아 작곡, 한재원 편곡의 '다시 하루가 지나고'라는 노래를 소개하고자 한다.
K-Pop 그리고 동아기획
본 숨은 명곡 시리즈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계시는 구독자분들께서는 이미 어느 정도는 작가의 개인적 취향이나 선호 음악들을 꿰차고 있으시리라 생각되는데, 특히 80~90년대의 많은 노래들은 K-Pop 언더그라운드의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 기획사 '동아 기획'에서 발매된 앨범과 아티스트가 굉장히 많다.
그저 '동아 기획'의 전성기라고만 회자하는 게 너무 아쉽고 부족할 정도로 K-Pop의 큰 줄기였던 이들도 1990년대 중후반 '서태지'와 '힙합' 그리고 '아이돌'로 급격하게 변모되는 문화나 장르적 특성, 그리고 LP/테이프/CD에서 Mp3/스트리밍 시대로 넘어가는 디지털화에 쓸쓸하게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음악산업에 디지털화는 음반 수입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의 모든 기획사들에게는 손쉽게 복사가 가능한 MP3 등장에 비즈니스모델 자체가 흔들려 허덕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나 방송 출연과 같은 부가적 수입을 올리기 어려웠던 '동아 기획'에게는 이러한 음반 수입의 감소는 턱밑까지 죄어오는 사형선고와도 같았을 수 있다.
'변화'를 결심했던 그들은 지금껏 그들을 있게 해 준 포크, 재즈, 블루스, 락 등 보다 아티스트의 음악성을 추구하는 방향성 보다 미디어에 기반한 여러 온그라운드 음악들을 시도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적 변화에 변화하려고 했던 그들의 시도에 많은 아티스트와 팬들이 등 돌리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동아기획의 마지막 몸부림,
Hush(허쉬)
몇몇 사람들은 '동아기획의 몰락'이라는 굉장히 듣기 거북한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 1990년대 말 동아기획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몇몇 그룹들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중 자주 등장하는 여성 듀오가 바로 'Hush'이다.
'Hush'는 조수아와 김일진으로 구성된 2인조 여성 듀오로 1999년 가을 K-Pop에 데뷔했는데, 당시는 1세대 아이돌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로 타이틀 곡인 'Hush', 후속곡 '애인' 등이 일부 방송을 타기도 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본격 활동을 한 다음 해인 2001년 해체되었다. 같은 시기 '동아기획'에서 내놓은 아이돌 그룹인 'SEE U'나 테크노 여성 듀오 '하니비' 또한 오랜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특히 데뷔 콘셉트로 잡았던 '동성애'는 누가 기획했는지 지금 봐도 어이없는 전형적인 노이즈 마케팅으로 허쉬뿐만 아니라 동아기획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다른 그룹은 잘 모르겠지만, 'Hush'는 여타의 다른 그룹에 비해 반드시 다시 재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멤버 중 조수아는 5세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여 미국 UCLA에서 피아노를 전공, 클래식을 공부하다가 대중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K-Pop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또 다른 멤버인 김일진 또한 한양대학교 작곡가를 나와 데뷔 전 박정현, 이은미, 듀스 이현도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멤버 모두 작사/작곡/편곡의 능력을 가진, 다른 여타의 가수들과는 차별성이 충분했던 출중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다.
요 근래 시티팝(City Pop)의 열풍에 힘입어 Hush의 노래 중 하나인 '애인'이 다시 관심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내 취향에는 잘 맞는 디스코풍의 흥겨운 숨은 명곡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만약 그때로 돌아가 동아기획의 기획자와 마주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를 Earth, Wind & Fire와 같은 빅밴드로 콘셉트를 잡아달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마치 지금의 부르노 마스의 여러 퍼포먼스처럼...
Hush의 해체이 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멤버 조수아와 김일진은 2002년 'Jubi'와 '일진'이라는 앨범을 내놓게 되는데 오늘 소개할 '다시 하루가 지나고'는 조수아의 예명인 'Jubi' 1집 The Phase Vol.1에 수록된 곡이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불렸던 긴 머리를 모두 자르고 짧은 단발머리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수아는 자신의 첫 번째 독집 앨범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자신의 음악 정체성을 마치 분출이라도 하듯이 15곡 모두를 작곡하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곡 하나하나 마다 일렉트로니카의 장르적 기술적 실험성을 거리낌 없이 활용하여 그녀의 음악성과 열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그녀 앨범의 노래와 느낌이 참 누구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바로 이전 숨은 명곡 백스무번째로 소개한 전자음악 밴드인 'W(Where the Story Ends)'가 참여하여 모든 곡의 작사는 'W'의 배영준이, 편곡은 'W'의 한재원이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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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솔로 앨범 발매 후 한 인터뷰에서 Hush 시절 때의 동성애 콘셉트, 노출 등이 창피해서 자신이 Hush의 멤버였음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아마 그녀에겐 적지 않은 음악적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도 같다.
그녀의 1집이 대중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잘 모르지만 오랫동안 JD Live라는 뮤직라이브바를 운영하면서 카페 내 밴드와 함께 관객들과 소통해 왔고 2018년 두장의 싱글 앨범을 내게 되는데 더욱더 성숙해지고 노련해진 그녀의 음악과 카시오페아 등 정통 퓨전재즈가 연상되는 연주를 들을 수 있어 굉장히 반가웠다.
그녀의 음악적 행보가 2018년 이후 끊겨 있다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일인데,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그녀의 음악세계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줬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다.
이별 후,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노래
오늘 소개한 숨은 명곡은 '다시 하루가 지나고'라는 노래로, 오직 피아노 연주와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보컬의 역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런 곡의 구성은 대부분의 보컬리스트의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아마 굉장히 부담스러운 형태일 것이다.
클래식과 재즈의 그 어느 경계선을 걸쳐있는 듯, 잔잔한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고 그 감미로운 선율을 따라 잠시 눈감으면 가냘프기만 한 조수아의 목소리에 온기 없이 어둡고 싸늘하기만 했던 수십 년 전 나의 작은 방이 떠오른다.
가성을 진성처럼 내는 '팔세토' 창법이 꽤 어울리는 그녀의 음색에 취하기도 잠시, 그 옛날 정신없이 지쳐 쓰러져, 마치 시체와 같이 잠들어 버렸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보니 이미 해가 진지 오래된 오후가 되어버린, 허탈한 하루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나를 보게 된다.
오늘은 며칠일까?
모든 걸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되살아난 그녀와의 수많은 기억들이 아직 온몸의 상처로 남아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했던 그때.
차마 버리지 못한 사진 한 장.
그리고 너무나 눈부신 너의 얼굴.
잠시 쓴 미소가 번진 내 얼굴이 느껴질 때쯤,
또다시 반복하는 부질없는 희망.
하지만 또다시 아파할 나에게 하고픈 말..
그래. 그때 우린
모든 걸 가졌었었으니, 괜찮아.
그리고 우린, 서서히 그 상처로 부터 치유되기 시작한다.
작사 : 배영준
작곡 : 조수아
편곡 : 한재원
노래 : 쥬비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어느새 지친 어둠이 무거운 담요처럼 음~
오늘은 며칠일까 내 길고 긴 한숨은
빛 고운 나비처럼 이 텅 빈 방을 날아가네
하얗게 쌓인 먼지 속에서 오랜 사진 한 장
오~ 언젠가 눈부시게 웃고 있는 너의 얼굴
덧없이 흘러가버린 날들 슬프진 않아
하~ 이미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을 가졌으니
음~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방안의 뿔을켜네 이렇게 또 하루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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