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진용 저, 도서출판 바른걸음 - 2026
아... 어디서 들었더라....
우리는 가끔씩 어떤 노래를 처음 마주하고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리 곱씹어 머릿속 기억 세포들을 휘휘 저어 뒤져 보아도 이건 처음 듣는 곡임이 분명하기만 한데,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저 편안하고 또 익숙하기만 하다. 마치 SF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시공간의 장면들까지 함께 스르르 밀려온다.
'샘플링 팝송, 추억을 소환하다'는 바로 그 흐릿한 친숙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찾아 아주 천천히 걷게 되는 산책과도 같은 책이다. 파란 하늘, 곧게 솟은 느티나무, 바람 속 귀가 따갑게 들리는 나뭇잎들의 수다, 눈부시도록 쏟아지는 햇살비,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수많은 잔상과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익숙하지만 새롭기만 한 풍경들.
이 작은 여정 끝에서 독자는 깨닫게 된다. 이젠 더 이상 찾지 않아 모두가 사라졌다 생각했던 음악은, 다른 시대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며 기억과 존재의 가치를 이어가기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방식으로 늘 곁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샘플링을 보다 쉬운 어법으로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는 샘플링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샘플링이라는 말은 원곡의 일부를 새롭게 만들어지는 곡 안에 삽입하는 방식, 혹은 특정 리프와 비트를 차용하는 제작 기법 정도로 이해되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대중들에겐 다분히 제작 용어처럼 들리기 쉬운데, 이 책은 샘플링을 기술의 언어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음악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의 파편, 혹은 한 세대가 그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문화와 정서의 유산으로 전달해 주기에 책의 글자와 눈을 맞추는 동안 샘플링은 더 이상 고난위도의 기술적 제작 방식이 아니라, 지나간 노래가 현재의 감각 속으로 찾아오는 아주 인간적인 소통의 통로로 느껴진다.
레전드 아티스트를 만나다
저자가 선택한 아티스트와 그들의 노래 모두 또한, 굉장히 인상적이다.
Aaliyah, Carpenters, Cher, Barbra Streisand, Donna Summer 같은 아티스트들은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레전드들로 각각 그들의 살았던 시대와 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책의 흐름 속에서는 그저 과거 추억거리의 스타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음악 속에서 빛을 발하는 원형이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변주되는 감정과 문화의 근원으로 설명한다. 어떤 곡은 후대의 힙합이나 R&B 속에서 리듬의 일부로 살아남고, 어떤 곡은 멜로디의 발자국만 잠시 남긴 채 전혀 다른 정서와 모습으로 변모된다. 그리고 이 변모의 과정은 단순한 산물의 재활용이 아니라, 한 시대의 언어가 다른 시대의 목소리로 번역되어 재창조되는 역사의 이어짐처럼 느껴진다.
음악 감상 방식을 바꾸는 경험
이 책을 읽으며 특히 좋았던 점은, 지은이가 과거의 곡들을 박물관 진열장 안 먼지 쌓인 오래된 유물처럼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인데, 단순히 “추억의 대상”으로만 떠받드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여전히 지금의 음악 안에서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독자는 과거의 음악을 그저 예전의 향수 속에서 추억놀이만 하지 않게 한다.
어쩌면 이는 저자가 의도한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과 관련된 이야기 일 수 있다. 예전에는 신곡을 마주하게 될 때 그저 새로운 노래로만 인식하게 되는 단순함을 가졌었다면, 이젠 그 안에 스며든 오래된 이야기들과 촘촘히 쌓여 있는 소통의 흔적들까지 함께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고 이는 음악 감상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경험이다.
또한 이 책은 “원곡이 더 위대하다”거나 “새로운 곡이 더 세련됐다”는 식의 단순 비교로 원곡과 샘플링곡의 관계를 우열의 문제로 보지 않기에 이 책에서 전하고 싶은 본질을 흐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낫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음악적 이야기들이 어떻게 다른 맥락에서 다시 살아나는가 인데, 이러한 태도 덕분에 이 책은 단순한 '음학'을 논하는 상식집이나 기술 서적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한 성숙한 시선을 담은 기록이 되는 것 같다. 샘플링을 다루는 글은 자칫 원곡의 위계질서로 줄 서기를 세우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나는 이것이 이 책의 품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어떤 순간들은
노래로 저장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마치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오래된 일기장의 그 첫 장을 열던 떨림을 내게 줬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어떤 순간들은 노래로 저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학창 시절의 술판을 떠올리게 하는 후렴과 추임새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애틋함을 아직까지 징징거리며 붙잡고 있는 가사와 멜로디가 있다.
샘플링은 그런 기억의 머릿속 저장 방식을 아주 신박한 형태로 확장해 주는데,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의 노래조차 지금의 음악 안에 들어와 내 기억처럼 작동하게 하는 듣도보지도 못한 전율을 선사한다. 그리고 나의 실제 기억은 이어진 끈 속 어느 지점에 남아 있을 텐데, 이 책은 시간의 경계를 지나 감정만이 이어지는 끈들의 보풀들을 순간순간 일상의 언어로 매우 따뜻하게 알려준다.
저자의 사랑이 느껴지는 책
읽는 내내 느껴졌던 또 다른 감정은 저자에 대한 신뢰였다. 이 책은 단순히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오래 들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음악과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너무나 좋아하는 것을 오래 바라보고 관찰해 온 사람 특유의 세심함과 섬세함이 문장과 글 모두에 남아있는데, 한 곡이 어떤 방식으로 변주되었는지, 그 차이가 어떤 정서를 만들어내는지, 원래 곡의 질감이 새 곡 안에서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설명에는 음악을 향한 애정과 사랑이 그대로 묻어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은 미사여구에 치장된 과장된 찬사나 비판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독자의 눈을 문장에 머무르게 한다.
결국, 음악은 글로만 남을 수 없는 것
물론 이 책에서 접하게 되는 아주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은 어쩔 수 없이 ‘청취의 경험’ 없이 글로만 접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소개된 곡들을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는 때때로 지루하고 현학적인 정보의 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음악은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감각적이자 감성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환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 되기도 하는데, 단순히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읽다가 멈추고 노래를 찾아 듣게 만들기 때문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잠시 책 바깥의 세상으로 나와 음악의 세계로 발을 옮기게 된다. 책이 감상의 영역을 확장시키게 되는 플레이리스트의 역할까지 한다는 뜻이다.
한 시대에서 박수와 함께 사라진 듯 보였던 멜로디가, 다른 시대의 비트와 목소리 속에서 다시 숨을 쉰다. 이 책은 그 멋진 순간의 귀환들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과거의 음악과 현재의 음악이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 긴 대화와 소통. 그리고 독자는 그 대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또 가장 즐거운 청자가 되기도 한다.
'샘플링 팝송, 추억을 소환하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정말 지금의 이야기일까?
어쩌면 그 안에는 오래전 누군가가 진절머리 나게 사랑했던 순간의 멜로디가 긴긴 시간 동안 흘러, 이제 내게 다시 돌아오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마치 잊고 살아온 내 찬란했던 그 아름다운 추억의 한 기억들처럼.
3월 어느 날 이 책의 저자이신 염진용 작가님께 서평과 관련된 반가운 요청을 댓글로 남겨 주셨다. 나 자신의 글도 잘 돌보지 못하는 허접한 작가에게 '감히' 서평 의뢰를 해 주신 작가님의 용기는 둘째 치더라도, 급격한 부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책이 집으로 도착하고 첫 번째 곡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가슴속 꿍하게 자리 잡았던 불편함이 점차 사라지고, 작가님의 글로부터 시작된 기억의 파편이 잊혀졌다고 믿었던 내 추억 속 또 다른 장면의 완성으로 퍼즐을 맞추게 되는 뭉클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 다시 한번 삶의 활력을 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Bynue
(이 도서는 서평을 위해 작가님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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