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K-Pop 명곡 II, 백여든여섯

어제의 기억으로, 윤상 : 내일은 늦으리 - 1992

by By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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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벚꽃이 다 져버렸다고?


돌이켜 보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똑같은 말을 매번 반복했었던 것도 같지만, 이번 봄은 역대급으로 조급하게 서둘러 우리를 떠나버린 듯하다. 마치 멀쩡했던 회사 사무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마치 꿈을 꾼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꽃이 피기 전 그 향긋한 공기를 맡을 기대나 준비 따위는 주지도 않고, 막 피기 시작한 거리를 천천히 걸을 여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잠깐 환해졌다가 또 너무 빨리 허전해 지고야 만다.


올해 서울 벚꽃은 3월 29일에 공식 개화했는데 이는 지난해보다 6일, 평년보다 10일 빠른 기록이었다. 기상청은 봄꽃 개화가 2월과 3월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설명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봄을 놓치고 있다고 느끼는 건 단지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계절이 정말 조금씩 그 순서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봄이 너무 빨리 와 버리고, 또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리면 아름답다는 말보다 먼저 아깝다는 말이 떠오르게 되기도 하는데,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감각은 대개 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천천히 오게 마련이지만, 위대한 자연의 흐름 중심에 서있는 계절은 항상 그것을 언제나 우리에게 알려줬던 것 같다. 작년에도 또 그전에도 우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예전보다 짧아진 봄의 호흡, 기다릴 틈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꽃의 시간표, 그리고 “분명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하고 중얼거리게 되는 어떤 낯섦 들은 뉴스보다 먼저 몸이 아는 변화, 설명보다 먼저 마음이 알아채는 이상함 같은 것인데, 기후위기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꺼내지 않아도, 벚꽃이 너무 일찍 피고 진다는 체감은 이상하리만치 사소해서 오히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체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계절의 풍경이 너무 선명한데도 여전히 누군가는 그것을 사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음모론이 늘 힘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꼭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이기 때문일 수 있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기만 하고, 변화의 원인은 여러 갈래이며, 책임은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음모론은 늘 서사가 단순하다. 누군가가 있다. 숨기고 있다. 조종하고 있다. 그러니 불안은 곧장 분노로 바뀌고, 현실은 이해하기 쉬운 드라마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데이터보다 이야기를, 사실보다 서사를 더 빨리 믿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개하고 나약한 인간인 나는, 도대체 뭐가 맞는 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이것이 음모론이 아니었을 때 우리가 감내해야 할 우리의 체력이 그만큼 튼튼한지가 늘 궁금할 뿐이고, 일부 쓸데없는 사치와 낭비라 할지라도 준비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 믿을 뿐이다.


그리고 꽃은 해마다 날짜를 바꾸며 먼저 대답하고 있다.


30여 년 전,
발표된 환경 프로젝트 음반


오늘 소개할 백여든여섯번째 숨은 명곡은 1992년에 발매된 윤상 작사/작곡/편곡의 '어제의 기억으로'라는 노래인데 이번에는 노래보다 먼저 그 시작된 자리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1992년 10월 25일.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빛나는 이름들이 '내일은 늦으리'라는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를 통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KBS와 조선일보가 주최하고, 신해철이 프로듀서를 맡은 이 공연은 단순한 쇼가 아니었다. 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현대그룹이 함께했고, 참여한 뮤지션들은 저마다 직접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담은 새 노래를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그 첫 회를 시작으로 '내일은 늦으리'는 1996년까지 5년 연속 개최됐다. 매년 한국 대중음악 씬의 세대를 횡단하며 더 많은 이름들이 모여들었는데, 지금 우리가 '90년대 한국 음악'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이름들이 이 무대를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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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내일은 늦으리' 관련 사진들


오늘 소개할 윤상의 '어제의 기억으로'라는 곡은 1992년 발표된 '92 내일은 늦으리' 첫 번째 기념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데 테마송 '더 늦기 전에'를 비롯해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 푸른 하늘, 이승환, N.EX.T, 015B, 이덕진, 그리고 윤상까지 당대 K-Pop을 이끌던 아티스트들이 함께 참여했다.


지금 봐도 놀라운 라인업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 ‘환경’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끌어안았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가수들이 한 장에 모였다는 것보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가 더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이 앨범의 가장 큰 힘은 누군가를 지금의 환경을 해하는 악당으로 지목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 않은 점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누가 우리를 속였는가를 외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가를 묻는 쪽에 가깝기만 하다.


하늘과 땅, 숨 쉬는 공기, 계절의 질서, 그리고 당연한 줄 알았던 풍경의 감각, 지금 와서 보면 이 질문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변함없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순간들이기만 한데,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 한쪽이 섬뜩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 흔한 일상의 질문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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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발매된 환경 보전 슈퍼 콘서트의 기념앨범 '내일은 늦으리' 앨범 표지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가장 놀라웠던 노래 중 하나는,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나를 용서해 주오'였다. 수많은 논란을 가진 그들의 1집이지만, 어쨌든 K-Pop의 역사를 바꾼 그 앨범 속의 노래들과는 사뭇 그 결이 많이 다른 '헤비메탈'에 가까운 곡이었는데, 그의 음악적 기반이 시나위로부터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대중들에겐 신선함을 넘어 당황함을 선사해 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시도들은 2집 '하여가'에서부터 시작된 음악적 콜라보로 서서히 대중에게 익숙한 장르의 음악적 융합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굉장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이때부터가 서태지의 진정한 음악적 가치와 실력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또 하나의 곡은 오늘 숨은 명곡으로 소개할 윤상의 '어제의 기억으로'인데, 이는 100% 나의 개인적 취향에 쏙 들어온 노래로 당대에 손꼽히던 시퀀싱의 달인이었던 그가 선사하는 전자음악의 진수와 아름다움이 모두 담겨있다. 참고로 이 노래는 그의 2.5집이라고도 불리는 2집 'Part 2'에 재수록되어 다음 해인 1993년에 발매되기도 한다.


https://brunch.co.kr/@bynue/107


기억이 소리가 될 때


오늘 소개할 백여든 여섯 번째 숨은 명곡 '어제의 기억으로'는 처음부터 서두르지 않는다.


조용히 깔리기 시작하는 신시사이저의 음색이 먼저 주변의 공기를 천천히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인트로도, 강렬한 첫 소절도 없다. 그저 안개처럼, 혹은 오래된 사진을 서랍에서 꺼내 보는 것처럼 느리고 조심스럽기만 한다.


윤상의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는 이 곡에서도 절제의 미학을 고집하는데, 슬픔을 과장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애처롭기만 하다. 애써 울부짖지도, 애원하지도 않고 하나하나 담담하게 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네고, 그 담담함 속에 무언가 꾹 눌러 담긴 것들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구조인데, 멜로디는 노래의 30~40%가 채 되지 않는 것만 같다. 마치 거대한 한 서사를 연주하는 합주 속에서 멜로디는 그저 하나의 악가와도 같이 서서히 우리들에게 무겁지만 진한 메시지를 남겨준다.


그의 멜로디는 단순하지만 끈질기게 귀에 남게 되는 것만 같은데, 이는 반복되는 후렴의 구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치 기억이 반복될수록 더 선명해지는 방식을 닮아 있는 것만 같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자꾸 꺼내볼수록 더 또렷해지고, 더 무거워진다.


사실 1990년대 초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 정도의 절제미를 지닌 곡의 구성은 굉장히 드물었던 것 같다. 많은 것을 덜어낸 자리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들리게 되듯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K-Pop 최고의 뮤지션의 뮤지션, 윤상이 전하는 담담한 마음이 귀로부터 마음속까지 미니멀한 일렉트로니카 서정의 전자음들을 타고 천천히 스며든다.


내년에도 찾아올 벚꽃


우리는 가끔 노래를 통해서 뒤늦게 무언가를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 이 노래가 단순히 환경에 대한 경고나 무서움을 알리는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곡은 사랑을 추억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계절을 돌아보게 하고, 풍경을 애도하게 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사실은 개인의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천천히 깨닫게 만든다.


먼 훗날, 너무 일찍 피고 져 버린 벚꽃을 바라보다가 이상하게 예전의 봄이 자꾸만 떠오르는 날이 있다면, 이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


그 때의 나는, 또다시 사라진 무언가에 대해 또 아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 노래는 내게 답할지 모른다.

사라진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고.




어제의 기억으로

윤상 : 내일은 늦으리 - 1992


작사 : 윤상

작곡 : 윤상

편곡 : 윤상

노래 : 윤상


너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건

지난날의 파란 그 하늘


눈 부시던 그 햇살과 향기로 가득했던 곳

이렇게 기억만으로 남겨져야 하는지


많은 것을 얻었지만 모두가 잃어버린 것

쉽게는 돌아오지 않을 어제의 시간들


눈 부시던 그 햇살과 향기로 가득했던 곳

이렇게 기억만으로 남겨져야 하는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

https://youtu.be/4KEy4WnoO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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