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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Oct 21. 2023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


우리의 첫 번째 제주 집은 아담한 이층 집이었다. 나는 돌담 너머 귤밭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사랑했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널찍한 계단을 좋아했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우리는 이층 집에서의 생활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제주에 오자마자 이삿짐을 풀고 정리하느라 바빴다.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고,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만드는 일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다. 둥지를 짓는 어미 새처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짐을 나르고 정리하다 보니, 다리에 근육통이 왔다. 집에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게 되다니.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내일부터 제주에 며칠간 대설특보가 발효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리하던 것들을 다 내동댕이치고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엄마, 우리 어디 가?”

“동백꽃 보러!”

“갑자기? 다음에 가면 안 돼?”

“응. 동백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거든.”


50분 남짓을 열심히 달려 위미리로 갔다. 커다랗고 동그란 동백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붉고 풍성한 꽃잎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날렸다. 반짝이는 웃음소리와 동백꽃 향기가 어우러져 마음이 충만해졌다.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삼 년째 살다 보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음에, 라는 말로 지나가고 나면 결국 놓치고 후회하게 된다. 특히 자연은 한낱 사람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커다란 시간의 톱니바퀴를 굴린다. 날씨마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므로 모든 순간은 딱 그 순간뿐, 다음이란 없다.


우리가 동백꽃 양탄자를 실컷 밟고 온 그날 밤부터 제주에는 며칠 동안 많은 눈이 내렸고, 동백꽃과는 다음 겨울까지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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