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6일 차
토요일 오후, 아이를 학원 행사에 참석시키고 다시 데리러 가기까지 무려 다섯 시간의 빈 틈이 생겼다. 얼마만이지. 둘만의 시간이? 그저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오래간만에 데이트라는 걸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자알. 어디로 갈까 정처 없이 배회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순 없으니 부지런히 클릭, 클릭, 포털과 SNS를 검색했다.
놀 계획 짜는 건 아무리 많이 해도 결코 질리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임에도 고민스러웠다. 교대 육아 체제인 우리 부부는 서로 번갈아 가며 육아를 도맡아서 개인 시간을 보장해 준다. 그렇게 각자만의 시간을 공고히 다지다가 오랜만에 무려, 다섯 시간을 단둘이 보내야 하는 것이다. 성격도, 취미도 교집합을 찾기 힘든 우리 둘을 만족시킬 만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애를 먹었다(생색 좀 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둘 다 대만족이었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일주동로 7747
많고 많은 카페 중에 이곳으로 오자고 그를 꼬드긴 미끼는 <가마솥 누룽지 빙수>였다. 시그니처 메뉴는 가마솥에서 끓여낸 한방차와 한식 다과상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남편의 입맛엔 팥빙수가 더 구미가 당길 것이므로.
달달구리를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은 카페를 좋아한다. 이미 한 끼 거하게 잡숩고도 휘낭시에로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이켜고 부른 배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꿀단지 한 통을 다 비운 곰돌이 푸우처럼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인다. 식후에 먹는 단 음식의 백해무익함을 아무리 설파해 봤자 소용이 없다. "당신도 먹을 거잖아. 한 입만 하기 없기다." 한 마디면 할 말을 잃던 나였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식단을 시작한 이후로 약 올리듯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두 부녀를 애써 못 본 척하면서 안방문을 걸어 잠근다.
다만, 오늘은 허락한다. 오늘만. 당신과 나에게 혈당 스파이크를 선사하노라. 이게 다 '둘만의 데이트'에 뭐가 씌어서 그런 것이다. 데이트니까 뭐, 괜찮아.
<가마솥 누룽지 빙수>와 <쑥 쌀갸또>를 시켰다. 녹기 쉬운 빙수부터 나눠 먹으며 요즘 고민이 무엇인지 얘기를 나눴다. 누룽지의 고소함과 우유빙수의 달콤함이 제법 조화로움에 감탄하면서. 맛도 맛이지만 식감의 어울림을 중시할 만큼 우리는 먹을 것에 진지한 사람들이다. 부드럽기만 하면 단 맛에 쉽게 질릴 수 있을텐데, 누룽지와 견과류의 바삭한 식감이 팥과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에 오도독오도독 씹는 재미를 더했다. 상반된 식감이 마치 MBTI로 치자면 극 T인 남편과 극 F인 나와 닮았달까.
매사 이성적이고 현실주의자인 남편은 대게는 공감보다 따가운 조언과 타박을 주기 일쑤였다. 예전에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고민을 털어놓는게 아님에도 내 잘못을 지적하고 따끔하게 충고하는 그에게 섭섭함이 컸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굴어주지 않는 서로를 탓하며 카카오톡으로 다퉜다. 속 시끄러운 상황을 아이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고 메신저 창에 불이 나도록 빽빽한 장문의 글을 탁구공처럼 주고받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인정하게 됐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 바꿀 수가 없구나. 당신은 당신으로서, 나는 나로서 각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로 했다. 그간의 싸움은 내려놓는 연습이었나 보다.
<쑥 갸또>는 쑥을 고농도로 압축해서 넣은 것인지 씁쓸한 뒷맛이 강렬했다. 접시를 남편 쪽으로 밀어 두고 다 먹으라고 순순히 양보한다. 이거 흔치 않은 일인데. 남편은 생크림이 담뿍 올려진 갸또를 한 입 베어 물며 예전보다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걱정 많은 나를 달랬다. 별 일을 별 일인 거처럼 확대 해석하지 않도록 다독여줬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라는 격려와 함께. 심란하던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미간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더 말하고 싶은 고민이 있었지만 할 말을 주워 삼킨다. 한 번 얘기하고 결론이 났으면 그걸로 된거다. 똑같은 문제를 되새김질하는 것을 남편은 싫어한다. 서로가 싫어하는 짓만 안 해도 평화로운 연대가 오래 유지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빙수 한 방울 남김없이 가마솥 그릇 바닥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냥 가긴 아쉬우니 기념사진 한 장 찍어줘야지. 이러려고 모처럼 화장도 하고 차려입었다. 손재주가 좋은 남편은 사진에는 영 소질이 없다. 매번 피사체를 대두에 육 등신으로 찍어서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이제 우리 가족 전문 사진사로서 경력만 십 년이 넘어서 그런가. 구도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제법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다 찍고 난 뒤 내게 폰을 건네며 하는 말에 폭소가 터지고야 말았다. 능글능글 미리 선수치는 것도 많이 늘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원님로 652번 길 118
핸드드립 커피와 직접 블렌딩 한 원두가 유명한 곳이다. 원목에 동그란 유리창을 낸 회전문부터 감성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찍는 곳마다 한 장의 엽서였다. 메뉴는 '택하다', 이름답게 선택의 묘미가 있다. 커피뿐만 아니라 담아낼 찻잔도 직접 골라야 한다. 빈티지 컬렉션이 진열된 선반에서 아름다운 찻잔과 접시들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계절마다 특별한 블렌딩 커피를 선보이는데 나는 <온실 블렌딩>, 남편은 <썸머 블렌딩>을 주문했다. 1차로 빙수와 케이크를 먹었으니 굳이 디저트를 안 시켜도 되건만, 우리는 또 크렘브륄레를 시켰다. 이거 원, 데이트를 빙자한 치팅데이가 틀림없다.
여느 카페에서 맛 본적 없는 블렌딩 커피의 매력을 음미했다. 온실 블렌딩은 친절하게 첨부된 QR코드의 설명대로 딸기초콜릿 향이 콧끝과 입 안에 그윽하게 머무른다. 썸머 블렌딩은 포도와인의 산미와 민트의 청량함이 그야말로 여름다운 맛이다.
2차 카페에서 우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아니 벌써 1차 카페에서 쏟아낸 걸로 오늘 대화의 총량을 다 써버린 듯하다. 우린 또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같은 테이블, 바로 곁에서 나는 책을 읽고 남편은 가져온 탭으로 본인의 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