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5일 차
연고 없는 타지에서 아이를 낳은 후 세 곳의 직장을 경험했습니다. 아이가 만 세 살을 넘겼을 무렵 무턱대고 이력서를 냈어요.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걱정은 뒤로 젖혀두고 그냥 해본 것. 당시에는 이 십 대에 쌓아놓은 스펙들이 철 지난 옷들처럼 구식으로 보였지요. 토익 점수도 유효기간을 넘긴 지 한참이었고요. 잊고 지냈던 파일에서 몇 해만에 열어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너무나 낡고 초라했습니다. 어디서 받아줄까? 무용함을 느꼈지만 유용함을 우겨야 했죠. 경력 단절의 공백은 애써 못 본 척하고 뻔뻔해지자고 생각했어요.
용기 내어 이력서를 넣은 곳 중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거기서 삼 년 가까이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제가 급조돼서 투입된 상황이었지만 저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죠. 저를 증명할 기회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일에 매진했을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회적인 인정 욕구도 채울 수 있었고요.
첫 번째 직장에서 일해보니 회사에서 제게 바라는 전문성이 무엇인지 감이 오더군요. 이직을 준비하는 동안 회계와 세무 관련 자격증을 땄습니다. 전공도 아닌 분야를 새롭게 공부하려니 머리가 터질 거 같았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야 했습니다. 간절함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자기 계발서에서나 보던 교훈이 남의 얘기만이 아니라 내 얘기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 나니 자연스레 지금의 직장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고요. 작은 성취가 큰 성취로 이어지는 기쁨을 알았어요. 따라서 도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직장인으로서 저는 원칙과 소통, 적극성을 중요시합니다.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여 일이 숙련되어야 유연함이 발휘된다고 생각해요. 익숙해지고 주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무조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주에서 첫 직장이 괸당문화가 만연하고 구설수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직책의 특성상 누구는 들어주고, 누구는 안 들어주면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어요. 일부러 융통성 없이 빡빡하게 굴었습니다. 당장은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대신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을 만한 신임을 얻었지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가는 스스로가 대견했어요.
초반에 외지인인 데다 관련 경험이 전무해서 무시도 당했지만 OO엄마가 아니라 제 이름 석 자로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소통했어요. 시키지 않는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남들이 귀찮아서 제쳐둔 일을 도맡아서 정리하니까 대표님의 인정도 받았고요. 단점은 제가 할 일이 늘어난다는 거지만요. 장점은 회사가 그만큼 저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산다고, 회사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란 것을 압니다. 다만 회사로서는 저의 부재가 곤란해질 만큼의 역할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관두고 이직 준비를 하면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을 잃어갈 때 용기를 준 것도 돌아오라는 전화였습니다. 이전 상사분들이 고맙게도 잊을만하면 재입사 의사를 물어봐주었습니다. 덕분에 제 근무 태도와 방식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출산 이후까지 다녔던 직장들을 머릿속에 나열하고 성취가 무엇이었나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반복해서 드러나는 성과라면 '수습기간의 단축', '가파른 급여 인상'입니다. 이렇게 쓰니 거창한데요. 그야말로 최저 기본급으로 시작해서 저보다 오래 일한 분을 단기간에 급여로 앞지른 적도 있습니다.
처음 근로계약서를 쓸 때 수습기간 삼 개월동안 급여는 기본급 전액이 아니라 일부만 지급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는데요. 저는 수습기간 삼 개월을 다 채우지 않고 정규직으로 채용된 경험이 세 번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배워서 떳떳하게 일 인분의 몫을 해야겠다는 책임감과 성실함이 발동해서인 거 같아요. 현재 직장에서 오 년 가까이 안착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태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잘 해냈던 경험'을 쓰려고 하니까 막막했어요. 못 해낸 건 수 십, 수 백 가지도 떠올릴 수 있는데 잘 한 건 기억이 안 나네요. 쓰다 보니 점차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저는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인정욕구도 강하고요.
아이에게는 젓가락질이 늘었다, 글씨가 예뻐졌다, 작은 변화 하나도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칭찬하면서 스스로에게는 칭찬에 박했네요. 잘 해낼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