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7일 차
안녕? 잠은 푹 잤니? 졸린 눈을 비비며 두 팔을 늘어 뜨리고 터덜터덜 거실로 나오던 너는 오늘따라 부쩍 키가 자라 있더구나. 밤새 누군가 정수리와 발끝을 붙잡고 쭉 늘여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길쭉해진 널 보면 가끔 내가 품었던 작은 아기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야.
미쉐린타이어의 캐릭터처럼 팔뚝과 종아리가 삼단으로 올록볼록하게 살이 접혀서 기어 다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지. 그땐 목욕을 마치고 나면 접힌 살을 살살 벌려서 바디로션을 발라 주어야 했어. 씻길 때도 마찬가지야. 그러지 않으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집 안의 먼지들이 살틈에 껴있거나 콤콤한 땀냄새가 났으니까. 나는 그 냄새조차 사랑스러웠어. 넌 아마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말이야.
함께 올라탄 엘리베이터 거울 너머로 나란히 선 너와 나를 봤어. 어느새 내 턱 밑까지 자랐더구나. 이제 서서 안을 때면 더 이상 네 얼굴이 가슴팍에 파묻히질 않아. 그게 아쉬워서인지 너는 매일밤 잠들기 전에 의식을 치러. 아빠와 엄마 침대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와 팔베개를 베고 우리의 가슴에 번갈아 얼굴을 묻지. 나누는 얘기는 대단한 게 없어. 네 머리를 감싸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동안 넌 그날 있었던 인상적인 일을 묻지 않아도 술술 꺼내놓으니까. 별 거 없는 얘기에서 아빠와 나는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이거 가벼이 넘어가도 될까 걱정스러운 대목에서는 너 몰래 눈빛을 교환하기도 해.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과 진담 사이에서 까르르 웃다가 때를 놓치고 정신을 차려. 잘 시간을 넘겼잖아. 훠어이, 얼른 네 방으로 가거라. 그럼 넌 어김없이 같이 자고 싶다고 애교를 부리지.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잔 지 삼 년이 흘렀는데도 넌 아직도 우리 품에서 자고 싶어 해. 잠자리 독립이 정신적인 독립과 반드시 때를 같이 하는 건 아니니까. 근데 너도 알잖아. 생활 습관에서만큼은 몸만 자란 아기 같은 네 애교가 아빠한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흥, 칫, 뿡. 응석부리기 삼단 콤보를 날려도 소용이 없단다.
엄마하고만 있었다면 아마 넌 내 흔들리는 눈빛을 감지하고 포기를 모른 채 조르고 매달렸을 거야. 올여름까지만 해도 나는 매일밤 답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했으니까. 같이 자자고 조르는 애처로운 애교에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더라. '이렇게 붙어서 자자고 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속엣말을 품고서 엉겨 붙는 네 어리광이 싫지만은 않았거든. 사춘기를 눈앞에 뒀으니 안아달라 할 때 무한정 품어 줘야 할까. 따로 잘 자던 아이가 갑자기 이러는 건 학교에서 힘든 일이 생겨서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네 눈빛과 입꼬리를 관찰하다가 곧 노파심이었구나 안심하게 되지만 말이야. 결국엔 엄마가 서운해하는 너를 혼자 자도록 내버려 두잖아. 그러고 얼마 안 지나서 네 방에 슬며시 들어가 보면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가득한 거야. 이렇게 잘 잘 거면서 왜 그런 거니?
너는 여전히 해맑고 순진무구하고 발랄해. 그 속에서 굳이 어두운 면을 찾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내가 곁에 없던 네 시간을 의심하는 게 엄마의 문제지. 너도 가끔 그러잖아. "엄마는 너무 걱정이 많아." 알아, 나도. 상상력이 풍부한 게 엄마가 되고부턴 재앙처럼 느껴지기도 해. 근데 있잖아, 엄마는 혼자일 때도 겁은 많았지만 말이야, 지금만큼 두렵진 않았단다. 너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서 네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 요즘은 뉴스를 일부러 피하고 있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사건 사고들이 걱정과 보호라는 이름 아래 너를 갑갑하게 만들진 않을까. 그게 또 걱정이야. 엄마 진짜 못 말리지?
이따금 피곤해서 너보다 먼저 곯아떨어지던 밤들을 영영 잊지 못할 거야. 너는 몰랐겠지만 엄마는 사실 반쯤은 깨어 있었어. 엄마의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고 이마의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 넘겨주던 자그맣고 다정한 손길에 잠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지. 내 양 볼에 입을 맞추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안방을 빠져나가던 너. 순순히 네 손길을 느끼고만 있다가 방문이 닫히는 순간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더라. 본 대로, 느낀 대로 돌려주는구나. 아니, 그 이상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대체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이기에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아빠와 엄마가 너의 우주라고 했었지? 아쉽지만 이제는 슬슬 너만의 우주를 만들어 가겠구나. 아니, 어쩜 이미 만들어진지도 모르지. 기억나니? 겨우 초등학교 이 학년 때였나. 궁금한 걸 코치코치 캐묻는 나에게 넌 이렇게 답했었어.
"엄마도 나한테 다 말해주지 않잖아. 나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어."
깜짝 놀랐었다. 아가라고 생각했는데 비밀이 생길 정도로 네 세상을 키워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걱정도 팔자인 나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을 사주고는 당부했었지. 이곳에 자유롭게 네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말이야. 다만 어렵고 힘든 일은 비밀이어선 안된다고. 혼내지 않을 테니 언제든 도와달라고 해도 좋다고. 그때 이후로 난 지금까지 네 일기장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어. 정말이야, 믿어줘.
네 우주 속 은하와 별들은 반드시 아빠와 엄마로부터 비롯된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너의 경험이 우리와 같지 않으니까.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겠지. 그런 날이 올 때 엄마는 이 편지를 꺼내보고 싶어. 너도 엄마가 이해 안 되는 날이 온다면 그래주길 바라며.
오늘도 사랑한다. 우리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