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8일 차
이 글은 5월의 어느 날 완성되었습니다. 브런치 발행 예약을 걸어두고 잠이 든 다음 날 새벽, 시아버지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서랍 속에 묵혀 있던 글에 먼지를 털어내고 이제야 꺼내 보입니다.
적당히 무료하고 평범한 하루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지극히 보통이었던 그날, 나의 절친한 친구 하나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또 다른 친구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준비되지 않은,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호스피스 병실에 누워 계신 아버님을 뵙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노동절과 어린이날이 연달아 이어진 휴일동안 친정과 시댁을 부지런히 오가며 가정의 달 다운 화목한 5월을 맞이했더랬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로는 왠지 모르게 울적한 기분에 메어 있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보내던 시간이 꿈결 같았다. 너무 행복했었나. 행복은 유효 기간이 짧다는 걸 실감하면서, 틈틈이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그럼에도 무기력에 무력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결코 가라앉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변주를 더하면서.
슬초브런치 작가들과 함께 하는 운동 단톡방에서 각오를 다지며 소홀했던 운동과 식단을 챙기기 시작했고, 책도 일부러 손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의욕이 사라졌다고 해서 손 놓고 있으면 우울함만 더할 뿐이란 걸 그간의 경험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말 그대로 꾸역꾸역. 회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 끝이 관성적으로 일을 해나가고 있을 때 PC카톡에 알림이 떴다.
용수철처럼 사무실을 뛰쳐나가 소식을 알려준 친구 C에게 전화를 걸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다시금 물어보는데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A는 여고시절부터 절친한 사이다. 각자 흩어져서 사느라 아무리 바쁘다 한들 계모임을 만들어서라도 일 년에 한두 번은 얼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이. 어린 시절부터 얽히고설킨 추억이 많으니 A의 어머님과도 떠올릴 기억이 적지 않았다. '평소에 지병이 있으시단 얘기는 못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부고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서있다가 A 생각이 났다. 얘 어떡하지.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을 견뎌야 하겠지. 망설임 없이 남편에게 아이 돌봄을 당부해 놓고 다음날 고향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카페인의 힘을 빌려 간신히 오후 업무에 몰두하려던 차였을까. 메신저 말풍선에 빨간색 숫자 '1'이 추가됐다. 미리 엿볼 수 있는 말머리에 [부고]라는 글자가 진하고 또렷했다.
이번엔 중학교 동창 B가 보내온 것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자마자 빈소가 차려진 경남 진주를 향해 바삐 내려가던 B는 통화 내내 울먹이고 있었다. 나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착잡했다. 가슴에 꽉 들어찬 먹먹함이 한동안 비워지지 않을 정도로.
하루 두 번의 부고. 나에겐 그토록 무료하던 일상이 친구들에게는 사고 같은 이별을 맞이한 날이었다.
진주와 부산, 하루에 두 곳의 빈소를 방문했다.
직장인인 친구들은 자기들을 보려고 낸 연차 휴가를 나보다 더 아까워했다. 제주에 사니까 직접 오지 않고 부의금으로 마음을 대신할 명분이 차고 넘친다고 여겼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희들인데 어떻게 안 가냐. 기쁜 소식으로 본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네.'
조문을 마치고 좀처럼 보기 힘든 친구들이 마주 앉았다. 공교롭게도 A의 어머님과 B의 아버님 두 분 다 말기 암을 진단받은 지, 한 달여만에 영면하였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했다. 혹은 항암치료를 받다가 지독스러운 고통에 오래 시달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고도 했다. 친구들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날벼락같은 부모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가 벌써 부모님과 작별할 나이가 되었나. 마흔에 접어든 게 엊그제 같은데. 돌아가신 친구들의 부모님은 일흔까지 살아보지 못하셨다. 미디어에서 하도 100세 시대를 외치니까 100세, 아니 적어도 여든은 누구나 당연히 거칠 수 있는 생의 관문이겠거니 짐작했다. 100세 시대라는 표어에 뒤통수가 얼얼하도록 배신감이 들었다.
당장은 생소하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연명 치료를 결정하는 부담을 짊어지우지 않기 위해 건강하심에도 미리 DNR동의서(연명치료계획서)에 서명을 한다는 부모님이 있었고, 간병인 보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남의 얘기라고 손 놓고 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을까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온정 없는 현실은 슬픔에 빠져있지만 말고 당장 눈앞의 숙제들부터 해치우라고, 그러니 제발 미래에 들이닥칠 위험부담을 줄이라고 경고한다.
동요하지 말고 덤덤히 해야 할 일을 해.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야. 어른이 되는 길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졌다.
하루동안 두 곳의 빈소에서 떠나신 분들의 명복을 기리고 돌아오면서 자꾸만 호스피스 병실에 누워 계신 아버님이 생각났다. 마음의 준비를 아무리 한다 해도 시아버지의 부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건강했던 아버님과 나눈 추억을 떠올리는 걸 오래도록 멈추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사 개월이 흐른 지금,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