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너에게 보내는 편지

100일 글쓰기 9일 차

by 뵤뵤


소파에 누워 <유년의 뜰>을 읽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부산직할시 수영로터리의 낡은 관광호텔 뒷골목에 서 있었다. 어떻게 그곳이 수영로터리인걸 알았냐고 묻는다면 유년 시절 기억 속에 우리 집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십 년 전쯤 호텔을 허물고 삐까번쩍한 신축 빌딩이 들어선 걸 봤는데. 더 눈을 의심케 한 장면은 바로 네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거다. 처음 보는 어른이 집 앞마당까지 성큼 들어와 있는 걸 보고 잔뜩 겁을 먹은 너.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 꿈속에서 만난 너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을 편지로 남겨 본다.




1987년 부산직할시에 사는 나윤이에게



안녕? 에구, 놀랐구나.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서. 넌 어릴 때부터 참 깜짝깜짝 잘도 놀랬어. 간이 어찌나 콩알만 했는지. 놀라는 반응이 재밌어서 까까머리 짓궂은 삼촌들이 자주 장난을 쳤지. 장난을 장난으로 웃어 넘기기 보다 매사 진짜로 받아들이던 네가 떠올라.


나? 나 누구냐고? 내 소개가 늦었네, 미안. 자세히 봐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니?

......

엄마랑 많이 닮았다고? 하하, 그래. 많이 닮았지. 난 너랑 너희 엄마랑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냥 이모라고 불러. 그게 편하겠다.

왜 혼자 마당에 나와있니? 아, 많이 심심하고 외롭다고? 하긴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얀 포대기에 둘둘 쌓인 꼬물이를 데리고 왔잖아. 걔가 뭐라고 품에서 도통 떨어뜨려 놓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곤 갑자기 너보고 언니라고 하시지? 참나, 언니고 동생이고, 엄마가 그렇게 부르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걔가 누군지 알 게 뭐야. 너는 고작 다섯 살인데 말이야.


근데 엄마 가슴팍에 찹쌀떡처럼 붙어있는 꼬물이 그 녀석한테 나는 냄새는 좋다고? 혹시 하얗고 미지근한 단내 아니니? 내가 좀 잘 알지, 크크. 그 냄새 어디서 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바로 꼬물이 입가랑 우유병에서 나는 거야. 엄마가 우유병에 톡톡 털어 넣는 가루가 눈꽃처럼 부서져 흩날릴 때 있잖아. 그때 손가락에 침 묻혀서 방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입에 넣어봐 봐. 아마 신세계일걸.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일 거야. 그렇게 맛있는 걸 왜 너는 안 주고 꼬물이만 주냐고? 얘, 그거 비싸. 너는 보리차 물에 밥 말아서 물에 씻은 김치만 얹어줘도 잘 씹어 먹지만 꼬물이는 이가 없어서 아직 못 씹거든. 그래서 그걸 먹는 거야.


어어? 왜 울라 그래? 너 서운하구나? 에이, 삼촌이랑 고모들이 맨날 울보라고 놀렸는데 진짜 눈물이 많긴 하다. 쉿! 그럼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맛난 눈꽃 가루가 가득 담긴 통 말이야. 냉장고 위에 있거든. 엄마가 밖에 나가 계실 때 냉장고 옆에 소파 등 위로 올라가 봐. 그리고 손을 쭉 뻗으면 통에 손이 닿아. 통을 살살 네 쪽으로 끌어당겨서 뚜껑을 열어 보면 안에 하얀색 숟가락이 있거든? 그걸로 한 숟갈씩만 퍼 먹으면 엄마가 절대 모르셔. 단, 하루에 꼭 한 숟갈이다. 약속해. 맛있다고 두 번, 세 번 퍼먹다간 들키고 말 거야. 너 혼나는 거 싫고 무섭지? 눈물 콧물 빼기 싫으면 약속 지켜야 돼. 알았지?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봐. 지금은 엄마가 온통 꼬물이한테 신경 쓰느라 널 봐주지 않는 게 외롭겠지만, 꼬물이가 자라잖아? 나중에 너랑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아 글쎄, 저 조막만 한 녀석이 네 말을 엄청 잘 듣게 된다니까? 갓 태어나서 좀 꼴뚜기같이 생겼어도 조금만 지나면 눈이 땡그랗게 커지고 이마가 볼록하니 엄청 귀여워져. 물론 콧물은 좀 많이 흘리지만, 그래서 뺨이 늘 말라붙은 콧물로 얼룩져서 꼬질꼬질하긴 할 건데 크크. 너 커봐라. 쟤가 네 보물이다. 엄마한테 '동생 낳아줘서 감사해요' 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저 녀석이 널 귀찮게 졸졸 따라다녀도 그렇게 미워하진 마. 먹을 것도 너무 자주 뺏어먹지 말고. 많이 아껴주고 예뻐해 주라. 네가 준 사랑과 칭찬을 듬뿍 먹고 자라 마음이 엄청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게 될 거거든. 그리고 그 기운을 너한테도 전해줄 거야.


이렇게 얘기만 들어서 잘 모르겠다고? 자꾸 어른들이 언니 됐으니까 그러면 안 되지, 언니인데 참아야지 그런다고? 하 참. 너도 힘들겠다. 내가 보기엔 너도 아직 애기인데 하루아침에 언니라고 어리광도 못 부린다니. 불공평하다, 진짜.


어디 보자, 지금 아직 7월이지? 그럼 그때가 아직 안 왔겠구나. 아마 곧 어마어마한 장맛비가 내릴 거야. 우리 집이 반지하잖아. 음... 반지하가 무슨 뜻이냐면... 바깥에 땅보다 우리 방이 더 낮은 곳에 있다는 뜻이야. 암튼 그날 억수로 많은 비가 쏟아져 내릴 건데 그래서 집 안에 아빠 무릎까지 빗물이 들어차는데 말이야.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마. 곧 괜찮아져. 아빠랑 삼촌들이 열심히 물을 밖으로 퍼 나르실 테니까. 그때 아빠가 소파 위에 너랑 꼬물이를 올려 두고 부탁을 하나 하실 거야.


"네가 언니니까 동생 지켜야 한데이. 아기 이렇게 잘 안고 있어야 된다. 알겠제?"


언니가 된다는 뜻을 몰라도, 지켜야 한다는 뜻을 몰라도, 넌 원래 아빠 말씀을 잘 듣는 아이니까 아기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겠지. 그때 아무리 팔이 저리고 아프더라도 꾹 참아야 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엄마가 너랑 아기가 잘 있는지 수시로 보러 오실 테니까 안심하고. 만약 그 시간이 지루하다면 아기 눈코입을 뚫어져라 쳐다봐. 그럼 심심함이 가실지 몰라. 어쨌든 그때 꼬물이 안고 있어야 해.


언니가 된다는 건 별거 아냐. 어렵지 않아. 그냥 나보다 작고 약한 아이를 꼭 안고 잘 지켜보면 돼. 그러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너는 놀려도 다른 집 애들이 동생을 놀리면 울컥 화가 나는 기분을 말이야. 얘, 너 심지어는 국민학교 가잖아? 꼬물이 괴롭히는 짝지 혼내주러 쉬는 시간마다 출동했다가 동생 담임 선생님한테 교실 출입금지까지 당한다니까. 하하.


지금은 잘 모르겠지? 그래, 다섯 살배기 너한텐 어려운 얘기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것만 기억해 둬. 꼬물이는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 될 거라는 거. 네가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이 물에 잠겼듯이 네 기분도 홀랑 흙탕물에 잠기는 날이 올 거야. 그때 널 건져 올려줄 사람, 네게 손 내밀어줄 사람이 바로 그 녀석이야. 그러니까 나 믿어.


이모는 이제 가봐야겠다.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어려운 얘기 투성이지? 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래도 집중해서 잘 들어줘서 고마워. 네가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 됐을 때,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 꼭 아는 척해줘.


그리고......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 그냥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와, 너 정말 작구나. 사진으로만 봐서 몰랐어. 네가 이토록 작을지. 다시 만났을 때 날 잊지 않길 바라. 그때도 지금처럼 꼭 안아준다면 좋겠어.


그럼 이만, 안녕.

건강히 잘 지내.



2025년 제주도에 사는 나윤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