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5일 차
'휴우, 언제 쓸 거야. 대체.'
그날 역시 쓰지 않는 자신을 책망하며 인스타그램 피드 속을 유랑하고 있었다. 스크롤만 내리면 무한히 갱신되는 세계. 딱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한 피드에서 엄지손가락의 상하 운동을 멈췄다. 눈에 익은 전시 포스터였다.
'어, 이거 도서관 게시판에서 봤는데.'
시작은 그저 호기심이었다. @book_jeju (@푸른청사과) 프로필을 누르고 들어가니
활자로 활기를 얻는
돌봄과 문화예술을 잇는
이란 수식어가 눈에 들어온다. 글쓰기, 명상, 독서, 그림, 전시, 출판을 한다는데 이 활동들을 다 하는 게 가능하다고?
피드 속 사람들은 일제히 무언가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오름에 올라 명상을 하고, 하다못해 전시회까지. 프로필 대문에 올려진 소개글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 곁에 영유아기 아이들이 보인다. 내 아이가 저만할 때 나는 뭐 했더라. 손이 많이 가던 미취학 아동기엔 육아와 회사일 말고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피곤에 절어 지냈는데. 무언가를 새로 도전하거나 시간을 쪼개어 대외활동을 한다는 건 그저 남의 얘기였을 뿐이다.
대단하다. 정말.
작고 네모난 게시물을 투과해서 온전히 전해지는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나는 저들 속에 있을 수 없겠지.'
시간 없다는 핑계로 글도 안 쓰는 판국에 그림의 떡이라 생각했다. 응원과 부러움을 절반씩 담은 팔로잉과 하트를 누르고 며칠이 지났을까. 워킹맘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신규 모집을 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얼씨구나 하고 기다렸다는 듯 신청서를 냈고 "활활살롱"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체 걱정이 많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경우의 수를 따지느라 초장부터 진을 다 빼버린다. 무성한 생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쉬운 일조차 복잡하고 어렵게 여긴다. '잘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자기 의심에 시달리다가 '아유, 지친다. 하지 말자.'라는 결론에 이른 적도 있다. 이 십 대를 허비했다고 곧잘 얘기하는 이유는 이렇듯 계획만 세우다가 시도조차 못하고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비용이 떠올라서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데. 꼭 잘하지 않아도 됐는데. 해보고 실패하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의 차이를 그때는 몰랐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까짓것 시작이라도 해볼 거 그랬다. 참 아깝다. 그 시절 청춘이.
브런치를 쉬는 몇 개월동안 쓰고 싶은 글은 많았지만 쓰지 않았다. SNS에 간헐적으로 짧은 상념을 기록하는 것만으론 영 성에 차지 않았지만 고집스럽게 '발행'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브런치에 올려도 될 글이 아니라는 자기 검열이 내내 발목을 잡은 탓이다.
브런치 속에서 날고 기는 작가들의 화려한 필력을 마주하면 그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움츠러들었다. 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하던 걸 이렇게 술술 읽히는 문장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다니. 그에 비하면 내 글은 남들 앞에 버젓이 공유할 만한 깊이 있는 주제인지 모르겠고 표현의 한계에도 자주 부딪혔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
그렇다면 나의 사유는 글을 쓰기에 아직은 협소하단 걸까.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 중에 대체 어떤 생각을 길어 올려야 기승전결이 뚜렷한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함께 브런치 작가로 입문한 "슬초브런치" 동기들이 글로써 승승장구하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도 기가 죽었다. 다독과 다상량의 내공이 느껴지는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내 글의 부족함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멀리 제쳐 두었다. 모자람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 아예 안 쓰고 안 보길 택한 거다. 일종의 회피였다.
그래놓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100일 쓰기를 도전할 마음을 먹었을까.
"활활살롱"에서 매일 한 줄 쓰기의 위력을 느낀 덕분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뭐 그리 쓸게 있을까 싶어도 딱 한 줄만 써보자고 마음먹으면 어느새 한 문장이 두 문장이 되고, 세 문장이 되어, 한 문단에 이르는 마법. 속으로 삼키는 말들이 많아서인지 일과는 같아도 그날의 감정은 다르니까 매일 쏟아낼 글밥이 생겨났다. 즉흥적으로 편하게 쓰다 보니 점점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잘 읽히려는 글 말고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걸 썼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중요한 걸 잊고 지냈다.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목적을 말이다.
나다워지기 위해 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의 내리기 위해 쓴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던 나쁜 버릇을 글쓰기에마저 적용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욕심과 부담을 내려놓으니 자연스레 재미가 샘솟는다. 설령 쌀로 밥 짓는 얘기, 우유로 치즈 만드는 얘기라 해도 그냥 써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독자가 읽고 싶어 하는 글은 지금 나에게 신경 쓸 단계가 아닌 거 같다. 아직은 내공을 쌓을 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마저 매일 써서 글쓰기 근력을 다질 뿐이다. 그치지 않고 지속하다 보면 어느새 이런 날도 오지 않을까.
"그냥 썼을 뿐인데 좋아해 주는 분들이 생겼어요."
라고 말할 날이.
로또 당첨만큼이나 운이 좋아야 할 것 같지만, 좋아서 쓰기 시작한 글이 인정까지 받는다면 그런 행운이 또 어디 있을까.
도전을 두려워하고 의지가 박약한 나에겐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이들의 기운이 필요하다. 브런치 작가로 입문해서 함께 쓰는 기쁨을 처음으로 알려준 "슬초브런치"가 그랬고, "활활살롱"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의욕이 충만한 이들의 기운을 성냥 삼아 사위어가는 불씨에 불을 지펴본다. 꾸준히 쓰는 삶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들 때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쓰고 있을 이들을 그려보며 오늘도 무작정 써 내려간 글 한 편을 마친다.
#활활살롱
#슬초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