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4일 차
간밤에 두 번을 깼다. 이게 다 지나치게 더운 탓이다. 땀으로 젖은 등 허리엔 자는 사이 눅눅해진 잠옷이 달라 붙어 찝찝했다. 아닌 밤중에 찬물 샤워라도 해야 하나. 이러니 별 수 없이 선풍기를 켜게 된다. 추석만 지나면 선선한 가을바람이 육지에서 돌아온 우리를 맞아줄 거라 기대했다. 여름이란 녀석이 이토록 오래 끈질길 줄은 몰랐다.
제주에선 10월에도 반팔... 역대 가장 늦은 열대야 기록
서귀포 31.7도, 10월 기온 신기록... 늦더위에 옷 가게 '울상'
제주는 아직 '반팔'이 대세... 가을 '늦더위'에 도민, 관광객 '헥헥'
연휴 동안 쏟아진 제주의 날씨 기사를 일일이 찾아보지 않고도 이미 절감하는 중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둔 사무실 실내 온도가 점심시간쯤엔 29도에 육박했으니까. 버틸 때까지 버텨보다가 끝내 에어컨 작동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했다.
'이러니 지구가 더 뜨거워지는 게 아닐까.'
에어컨을 포기할 마음이 없으면서 다 무용한 걱정일 뿐이다.
이러다 올해도 가을과 스치듯 안녕해야 하는 건 아닐까. 매년 가을이 사라지는 현실이 씁쓸하다.
제주의 사계절 중 언제가 가장 좋냐고 묻는다면 가을을 꼽고 싶다. 여름 내내 불볕을 견디다가 낡고 바래진 자연의 색이 말린 장미의 그윽함을 닮은 듯해서. 얼핏 생기를 잃어 지쳐 보이는 것 같아도 태연히 뿜어내는 느긋함에서 원숙미를 엿볼 수 있다. 중년에 접어들어서 그런가 일부러 나이에 비유할 생각은 없지만 자꾸만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제주는 기후 여건 상 육지에 비해 단풍이 흔한 구경은 아니다. 동네 뒷산만 가봐도 단풍나무가 천지였고, 대로변 가로수는 죄다 은행나무였던 내 고향과는 아주 딴판인 셈이다. 제주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예사로 여겼던 단풍을 귀하게 바라본다.
유감스럽게도 제주의 단풍이 절정인 시기가 매년 늦춰지고 있다. 서귀포만 해도 그렇다. 작년에는 11월이 지나도록 은행잎이 초록색이더니, 노란 옷으로 다 갈아입지 못한 채 12월 찬 바람을 맞고 후드득 떨어져 버렸다. 초록빛인 낙엽들을 밟아 본 적 있는가.
불과 이 년 전만 하더라도 은행잎이 우수수 비처럼 내려서 노란 카펫이 깔렸었는데.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두텁게 쌓인 노란 은행잎을 한 움큼씩 집어 들고 눈싸움하듯이 흩뿌리며 놀았는데 말이다. 작년에는 그럴 수 없었다. 10월까지 이어지는 열대야로 보아하니 올해도 역시 기대조차 말아야겠다.
기후 위기는 제주 곳곳에서 심각함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에서는 수온이 상승한 탓에 특산물이던 어종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한치는 금치라 불리고 대방어도 제주 특산물이라 불리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간다. 고온을 이기지 못하고 익기도 전에 껍질이 벌어져서 폐기되는 레드향 때문에 시름하는 농가가 한 둘이 아니다. 농수산업에 종사하는 생산자들의 생존이, 소비자들의 먹거리가 위협받고 있다.
이제 에어컨을 그만 켜고 싶다. 장롱 속에 틀어 박혔던 바바리코트를 꺼내 서늘한 가을바람을 못 이기는 척 코트 깃을 여미고 싶다. 텀블러를 챙기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플라스틱을 적게 사용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공약들로 마무리 짓는다면 이 글의 완성도가 올라가려나.
나는 그저 오늘의 푸념을 늘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가을이 사라지는 아쉬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