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7일 차
성해나 작가를 만나고 왔습니다. 올해 가장 핫한 작가님이 제주까지 내려온다는 데 안 갈 수가 없죠. 출간 이후 상반기 내내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였던 <혼모노>를 안 읽고 넘어갈 순 없던 것처럼요. '여름과 어울리는 소설 추천'에서 빠지지 않는 <두고 온 여름>까지 읽은 터라 설렘이 고조됐습니다.
영화를 본 건지, 소설을 읽은 건지 헷갈렸습니다. <혼모노>를 다 읽고 책을 덮으며 느낀 소감이에요. 영화감독 팬클럽 회원,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게 된 재미교포, 30년 차 박수무당, 건축가, 지역재생 스타트업 직원, 자식을 향한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며느리와 시부, 섬마을에서 메탈밴드를 꿈꾸는 세 친구. 배경과 인물이 겹치는 부분 하나 없이 각양각색인데 작가가 마치 모든 인물의 생을 다 살아본 거 같았어요.
'주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거 같아, 이런 사람들.'
그만큼 인물의 감정선과 상황이 설득력 있고 현실감 있게 그려졌죠. 박정민 배우가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추천사를 남긴 게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니 저절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질 수밖에요.
글 쓰기 전엔 소설 속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구성과 문체를 눈여겨보게 돼요. 쓰는 사람으로 저를 부르게 되니 읽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지요. 성해나 작가의 문장은 마치 조약돌 같았어요. 잔잔한 물결 아래 비치는, 모난 구석 없이 맨들맨들하고 단단한 조약돌이요. 군더더기 없이 술술 읽히는 그녀의 글이 부러웠습니다. 강연을 들으니 소설 속에 꽉 들어찬 그녀의 내공이 왜 단단할 수밖에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어요.
강연의 주제는
<'진짜' 사랑-글을 쓰며 끌어안은 것들>
성해나 작가가 말하는 진짜 사랑은 입체적인 인간을 사려 깊게 이해하는 일이었어요. 요즘 세대차이, 정치적 이념, 성별 간에 갈라치기와 흑백논리로 혐오가 만연한 분위기잖아요. 뉴스나 기사에서 정해주는 프레임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사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면도 있고요. 그런 수고를 일일이 들이기엔 삶이 너무 팍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태도로 다작, 다독, 다상량과 더불어 '다정'을 꼽았습니다. 여기서 다정이란, 속단 없이 바라보는 관용의 자세예요. 이타보다 이기를 가르치는 세상을 역행하는 장르인 문학을 통해 서로에게 인내하고 서로의 처음을 너그럽게 봐주자고 말합니다. 때로는 마주하는 사람들마다 지닌 겹겹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연습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보니까요.
글 속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관계없이 그들의 숨겨진 서사를 상상해 보게 된다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 중 소외되는 이 하나 없이 공정한 애정을 주려고 노력한다고요. 노력의 일환으로 인물의 직업과 생활환경에 대한 자료 조사를 꼼꼼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배우와 이미지를 매칭시켜 본다고 해요.
성해나 작가의 꿈 중에 건축가가 있었고, 건축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하죠. 지반을 다지고 토대를 놓아 기둥을 올리는 견고함이 소설 속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탄탄한 서사가 절로 나오는 게 아니란 걸 배웠습니다. 최근 출연한 유튜브에서 나눈 얘기도 이와 비슷해요.
"나의 고유한 인장은 뭘까? 내 인장이 없어서 내 소설이 사람들에게 안 읽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원래는 인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괜찮아, 인장과 다르지 않은 나만의 탁본이 있으니까."
멋지게 들렸습니다. 인장이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 한다면 아직 고유함은 없다고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게다가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의 삶을 그리고, 어딘가 있을 법한 사건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상상하고 재현해 내는 탁본의 기술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까지도요. <스무드>를 쓰기 위해 실제로 태극기 집회에 가서 굿즈를 구입하고 거리 행진에 참여했다고 하죠. 근면 성실함이 자신감의 원천이라 느꼈습니다. 글뿐만 아니라 작가에게 매료되는 지점이었어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혼모노>는 영화 시나리오로 쓰여도 무색할 정도였다, 만약 영화화가 된다면 상업적인 의도로 변질되지 않고 작가님의 고유한 의도가 담기길 바라냐고 물었습니다. "혹시 영화나 드라마 관계자세요?"라고 도로 물으셔서 아니라 답하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님은 영화화 안 됐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심경과 더불어 만약 되더라도 영화는 오롯이 감독의 영역이니 각색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답해 줬어요.
맺음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말고 독자의 사유를 많이 덧붙여주길 바란다고요. 처음은 이야기의 큰 줄기를 따라 읽었다면, 재독 할 때는 각 인물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저만의 의견을 더해 다른 시선으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해나 작가에게 필명으로 사인을 받았어요.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이라고 하니 진지한 표정으로 꼭 읽어보겠다고 하더군요. 인사치레라 하더라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니까 제 글을 읽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신 그녀로부터 중요한 걸 많이 배웠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