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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100일 글쓰기 18일 차

by 뵤뵤



- 오늘 숙제 많아?


- 아니, 수학숙제 하나 있어.


-그럼 한 시간만 엄마랑 놀다가 들어가자. 오늘 하늘이 너어무 이뻐.

이런 날은 노을을 꼭 봐줘야 해.


-좋아!







- 와아, 여기서 캔맥주 마셔도 좋겠다.


- 무슨 소리야, 엄마! 지금 다이어트 중이잖아.


- 맞다, 맞아. 히힛. 아무튼 맥주 생각이 절로 날만큼 낭만 지수가 200 퍼센트 올랐단 거야.




주저리주저리 길어지는 엄마의 수다에

대답 없던 너는 갑자기 빨간 등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니?




- 어디까지 가? 넘어진다. 천천히 달려.


- 엄마, 나 잡아봐아라.


- 너무 빠르거든? 나 지금 피곤해서 도저히 뛸 힘이 없다고.


- 달리면 얼굴에 닿는 바람이 좋으니까 그래. 엄마도 어서 달려봐.


- 에구구, 그래. 같이 뛰어보자. 헥헥.




등대가 있는 방파제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어슴푸레하던 저녁놀이 짙어진 채도로

우리를 맞이한다. 얼른 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하늘이 컴컴한 어둠으로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하니 서두를 수밖에.







- 엄마는 오늘 하루가 별로 재미가 없었어. 넌 어땠어?


- 나는 완전 재밌었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쫑알쫑알 특별한 일을 늘어놓는 네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부정적인 일에 집중하기보다 하루 중

좋았던 순간을 발견하고 재미를 느끼는

너의 긍정을 사랑한다.

어른인 내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보통인 일상에 소소한

변주를 주었더니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저녁놀 덕분에 오늘도 감사히 저물어 간다.







길었던 연휴 끝에 일상으로 복귀하자니 유독 지치던 한 주였습니다.

사진첩을 넘겨보다 저녁놀 사진에 잠시 머물러 숨을 돌렸어요.

'아, 맞아. 이런 때도 있었지.'

아이가 보여준 천진난만한 웃음과 잡기 놀이를 했던 순간의 벅차오름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꼭 매일이 좋은 일만 가득할 순 없잖아.'

웃음 지었던 기억 한 알을 비타민처럼 꺼내먹고 힘을 내보았습니다.


기억의 뇌라 불리는 해마는 저장된 기억 중 필요한 것은 남기고 불필요한 것은 지워버립니다.

불쾌했던 경험은 불필요한 기억입니다. 오래 붙잡고 곱씹을 이유가 없지요.

상상해 봅니다. 머릿속에 방이 하나 있어요.

방바닥에 찌꺼기처럼 나뒹구는 기억이 있습니다.

자꾸만 까끌까끌하게 밟히어 불편해요.

청소기를 돌립니다. 흡입력이 좋아서 시원스레 빨아들이네요.

청소기의 제조사는 '망각'이고 제품명은 '블랙홀'입니다.

이름값이 제대로라 만족스러워요.

깨끗해진 방에 고스란히 남은 기억은 행복입니다.

어여쁜 액자에 고이 담아 벽에 걸고, 침대 머리맡에 놓아요.

오래오래 두고 볼 수 있게요.


반복해서 떠올리고 반복해서 말하면 기억이 선명해집니다.

좋은 기억을 나누다 보면 당신도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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