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22일 차
-넵.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처리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기 없는 단어들을 남발하다 보면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상대의 말하지 않은 진심을 파악하느라 애를 썼던 지난날이 참 많이 버거웠다.
그래서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번역하지 않기로 한다.
어조, 표정, 몸짓 언어, 앞 뒤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는 행간을 굳이 읽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심리 상담도 가능하다는 최신 챗GPT보다 버전이 낮은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 씁쓸하지만 어쩌랴. 이 또한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인 것을.
시키는 일은 해야 하고,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생각을 줄일 수밖에. 그러기로 선택한 지 벌써 몇 년째인지.
겨울에 습도 30퍼센트 이하의 건조함을 자랑하는 사무실에서 진심을 덜어낸 대화만 주고받다 보면 마음에도 버짐이 핀다.
허옇고 까슬까슬한 버짐이.
퇴근 시간을 알리는 알림이 뜬다. PC를 끄고 책상 위 흐트러진 서류들을 곱게 포개어 정리한다. 마저 매듭짓지 못한 일은 내일 다시 머리 써보기로 하면서. 찝찝함은 사무실 형광등 조명과 동시에 꺼버리고 출입문을 닫는다. 직장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근심거리를 집까지 안고 갔다간 꿈자리마저 뒤숭숭 할 테니까. 온 오프가 재깍재깍 안 되던 시절의 얘기다.
차에 시동을 걸고 근태 관리 앱에 <퇴근>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가면을 내려놓는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속을 알 수 없는 가면이다. 문득 좋고 싫음이 표정과 태도로 투명하게 드러나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포커페이스는 여전히 어렵지만 나이 들수록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해가 짧아졌다. 이대로 집에 가긴 왠지 아쉽다. 우측으로 꺾으려던 깜빡이를 끄고 직선으로 내달려본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하염없이 가고프다. 화창했던 오늘의 끝자락인 노을은 날씨와 정반대였던 내 기분을 어떤 느낌으로 맞이할까. 우선은 반갑다. 종일 실내에 있다 처음 올려다보는 하늘이. 방파제를 휘돌아 흐르는 바닷물의 유속이 잔잔하다. 한 몸같이 굴던 파도와 바람이 오랜만에 아우성을 그치고 잠잠해지기로 약속했나 보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산란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현실적인 고민이 일상의 꼬리표처럼 따라붙어서다.
여기저기서 경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 위기가 우리 회사만 비켜가란 법은 없다. 회사의 재정난과 고용 불안정이라는 고민에서 한 발 물러나 당면한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 어디 내 마음이 마음 같았던 적이 있던가. 당장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애써 눈 감고 모른 척하는 것으로 위안삼을 수 없음을 안다.
'과연 언제까지 워킹맘일 수 있을까.'
워킹맘은 한시적 수식어일 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틈 나는 대로 채용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려 보지만 육지의 대도시에 비해 제주에서 내가 들어갈 취업 문은 바늘구멍보다 좁아 보인다. 지금은 한창 귤철이라 귤 따고 선과 하는 일손이 인기 좋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은 수가 적고 빈자리도 잘 나지 않는다. 바지런한 삼춘들은 봄에는 고사리 따고 가을에는 귤 따서 용돈 벌이를 거뜬히 한다는데 손 끝이 야물지 못한 데다 사무직의 고질병인 목, 어깨, 허리 통증을 달고 사는 나로선 영 자신 없는 노동이다. 그들이 흘리는 땀만큼 수고할 체력과 요령이 없다.
이쯤 되면 아무리 마음에 까슬까슬 버짐이 핀다 해도 지금 다니는 직장 생활에 감지덕지해야 한다. 매일 마주해야 하는 숫자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소리 역시 배부른 사치일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시간과 스트레스를 담보로 해야 얻어지는 것이 급여 아니었던가. 견뎌야지, 버텨야지 하던 시간이 쌓여 N연차 직장러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나를 먹여 살리는 회사가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소실됐다 해도, 돌아가는 상황이 도무지 납득되질 않아 냉소를 부른다 해도 마지막까지 버텨야 한다. 직장 생활의 단비 같던 동료들이 하나 둘 그만둘 때마다 누누이 되뇌었던 말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영 내키지 않아도 일상에의 복무를 이어가야겠다. 읽고, 쓰고, 산책하는 것으로 버티는 삶에 윤활유를 더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 '존버'를 누군가가 '존중하며 버티기'로 바꿔 부르더라. 그래, 어떻게든 견디고 있는 나를 존중하고 직장 동료들을 존중하며 잘 버텨보는 거다. 그것도 꾸역꾸역. 영화 <데드풀>로 유명해진 황석희 번역가는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뭔가를 해내는 주체적인 느낌이기에 꾸역꾸역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한다. "결말을 알면서도 노래하는 것", "이번엔 다를 거라고 믿는 것". 뮤지컬 <하데스타운> 속 대사라 했던가. 그는 인간은 결과를 알면서도 이번엔 다를 거라고 믿으면서 노래하는 존재이며, 결말을 알지만 꾸역꾸역 웃으면서 갈 수 있는 인간의 의지가 중요한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현재 내가 하는 고민들은 실체가 없다. 위기 상황이지만 아직은 결말에 이르지 않았다. 꾸역꾸역의 의지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비를 넘기는 자세에 대해 갈피를 못 잡고 고민한 끝에 나는 노선을 정했다. 존버와 꾸역꾸역의 이점을 취해보기로 말이다. 이번엔 결과가 다를 것인지 확신은 없지만, 노래까지 부를 기분은 안 나겠지만,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