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23일 차
매일 저녁, 나는 열렬한 청취자가 되어야 한다.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꼬마 수다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수다꾼은 그날 있던 인상 깊은 일들을 풀어놓길 좋아하는데 문제는 숙제를 하는 중간에도 입을 가만 내버려 두질 못한다는 거다. 이야기의 시작은 늘 관심끌기부터. 마치 엄청나게 요긴한 할 말이 있다는 듯 "엄마, 엄마! 있잖아."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물론 내 기준에) 이야기를 거하게 풀어놓는다. 반짝이는 눈으로 속사포처럼 말하는 아이에게 홀린 듯이 듣다가 정신을 차릴 때는 이미 늦었다. 아차차, 얘 지금 숙제하는 중이지.
"할 일 다 끝내놓고 얘기하자. 집중해."
근엄하게 경고해 보지만 김 빠져서 입을 삐죽 대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다.
그날도 여지없었다. 얘가 또 무슨 얘길 하려나.
"엄마, 엄마! 있잖아. 오늘 학교에 <장갑 그림책 시리즈>를 쓰신 유설화 작가님이 오셨는데 말이야. 나 그분께 책에 사인받고 이야기도 들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장갑시리즈 전부 읽었는데 그거 다 엄청 재밌어. 타고난 이야기꾼이신가 봐 그치? 어쩜 이름도 유설화이실까? 설. 화. 참 작가님 다운 이름이야."
얘야, 숨 좀 쉬고 말하려무나. 따발총처럼 하고픈 얘기를 쏟아내는 본새가 클래식 음악 대신 '쇼미더머니'로 태교를 한 탓인진 모르겠다. 아이가 한 템포 쉬어가는 잠깐의 정적을 틈타 '숙제해라' 잔소리를 시전 하려던 찰나 그냥 흘려듣기에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엄마도 유명한 작가님 돼서
10년 뒤에는 강연 다녀야지.
그럼 정말 좋겠다.
강연. 강연이라. 막연하게 출간을 꿈꿔본 적 있지만 강연까진 바라본 적 없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막연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바라는 시기나 목표를 세워둔 것은 아니다. 현재 종사하는 생업과 육아에 글쓰기를 보탠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빠듯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으로 가득 찬 아이의 말에 덩달아 기운차게 화답할 수 없던 것도 자신이 없어서였다.
강연을 한다면 특정 대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거나 진정성을 담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서사와 역량이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이제야 나라는 사람을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매사 생각이 복잡한 엄마는 또 단순하게 굴지 못하고 진지하게 대답해 버렸다.
"그럼 좋기야 하겠지만, 엄마가 강연을 할 수 있을까? 하하."
"엄마! 꿈을 크게 가져야지. 꿈은 높고 크게 가지랬어. 그래야 다 이루지 못해도 원래 갈 수 있는 도착지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거야."
어?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익숙하다. 익숙해. 아이는 또래답지 않은 의젓함을 뽐내며 뒷 말을 이었다.
"일단 꿈을 크게 잡고 달려. 끝까지 달리다 보면 평지든, 바다든, 뭐가 나오겠지."
언젠가 내가 아이에게 해주던 얘기였다. 꿈은 높고 클수록 좋다는. 그 꿈이 때론 터무니없다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돈과 시간이라는 제약이 꿈의 크기를 정해준다는 냉정한 현실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아직 한계를 염두에 두기엔 어리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까.
해맑은 아이 덕분에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치 이전에 일단 나를 정의하는데 비중을 두고 쓰는 요즘이 아닌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이라 아이가 해준 한 마디에 사색할 재료를 얻었다. 아이에게 고마웠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 <작가의 서랍> 속 발행할 글감을 고르고 골라 문장을 이어가다가 곁에서 산만하게 구는 아이에게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그때 아이는 숙제와 잘 준비를 끝마치고 자유시간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요즘 푹 빠진 "우리들의 발라드"를 틀어놓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참가자들의 노래를 감상하던 아이에게 찬 물을 끼얹은 것이다. 소리가 너무 크다, 볼륨 좀 줄여라. 그냥 책 좀 읽으면 안 되냐. 뱉어놓고 후회할 말은 대체 왜 하는 건지. 아이는 글 쓰는 엄마를 항상 응원해 줬다. <좋은생각> 9월호에 내 글이 실리게 됐을 때도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스러워했다. 어쩜 나보다 더 내 일을 기뻐해주는 자식이라니, 호강에 겨운 엄마임에 틀림없다.
신경질적인 일침에 상처받은 아이의 표정을 보고 엎질러진 말들을 후회했다. 읽고 쓰는 엄마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하게, 쓰느라 유세를 떠는 모양이 돼버렸다. 글 속에서 좋은 엄마가 되고자 했던 다짐들과 현실 속의 나는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아직이다. 아직.
100일 글쓰기를 하느라 엄마가 무서워졌다는 말을 들은 그날, 이게 다 뭔 소용이냐 싶어 결국 글을 발행하지 못한 채 <브런치>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을 깊게 들지 못했다. 분명 아침에 눈을 뜨기 전까지 기나긴 꿈을 꿨던 거 같은데 기억이 흐릿했다. 아이에게 사과하는 꿈이었을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와서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나랑 약속해. 최대 10년이야. 10년 뒤면 무조건 강연 다니기로. 오케이?"
"그... 그래."
부디 엄마의 흔들리는 동공을, 자신 없는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며 아이가 자그마한 주먹 위로 치켜든 새끼손가락에 나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