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55화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레테는 망각의 여신이라고 알려주었다. 대한민국의 학부모라면 '레벨테스트'의 약자로 더 친숙할지 모르겠다.
대치와 목동에서 입시 수학을 가르쳤다는 저명한 원장님 앞에 앉아 있다. 아이는 옆 강의실에서 수학 레벨테스트를 치르는 중이다. 상담실에 앉아 종이컵에 담긴 미지근한 맹물로 메마른 입안을 축여 본다. 원장은 커피나 차를 권했지만 사양했다. 시험 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두르느라 아이만 챙겨 먹이고 아침을 거른 탓이다. 본디 토요일 오전이란 소파와 마음껏 한 몸이 되어도 좋을 때지만 드물게 부지런을 떨었다. 번번이 소나기가 내리는 문제집 앞에서 아이가 한바탕 눈물을 쏟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숙제를 열심히 하면 뭐 해, 흑흑....노력해도 안 되잖아. 결과가 안 좋으니까 하기 싫어져, 흑흑...."
수포자의 문턱을 넘을까 말까를 고민하기에 한참은 이른 초등학생에게 어떤 위로를 해주어야 하나. 수학을 포기한 이력을 가진 문과적 엄마는 알맹이 없는 격려만 돌림노래 부르듯이 건넬 뿐이었다. 다니고 있는 학원 선생님에게 피드백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매번 칭찬과 감사로 끝을 맺는 상담이 아이가 겪는 어려움을 외면하고 현재에 안주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객관적인 실력과 위치를 전국 단위로 분석해 준다는 새로운 학원을 찾은 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에 내린 결론이었다.
원장은 능변가였다. 다수의 학생을 가르쳐본 연륜이 눈빛과 몸짓 언어로 뿜어져 나왔다. 도무지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아이의 학습 태도부터 성적에 대한 고민까지 술술 털어놓게 됐다. 연산과 사고력 문제집을 한 장씩 푸는 숙제를 버거워한다고 얘기하자 돌아온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부모님이 보시기엔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공부하는 양일 테지만 학교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매일 소나기를 맞는 기분일 수 있어요. 일을 마치고 퇴근한 직장인에게 재택근무로 잔업을 시킨다면 어떨까요?"
으아, 싫어라. 몸서리를 쳤다. 불현듯 시험지와 씨름 중인 아이가 애틋하기 짝이 없어서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다. 주말 오전을 기꺼이 수학에 내어준 아이를 두 팔 벌려 꼭 안아주고 싶어졌다. 원장은 탄식을 내지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학부모로서 함양해야 할 태도와 지침을 알려주었다.
레벨테스트가 끝나고 차에 올라타는 아이의 발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워 보인다. 바윗돌이 얹힌 듯 어깨가 뻐근한 건 나뿐인가. 부모가 된 걸로 족했지, 학부모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우리 점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마라탕!"
정상 범위를 벗어난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찜찜하다. 네 어미의 건강을 위해서 다른 걸 먹자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잔뜩 신이 나 들뜬 아이를 실망하게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면 오메가 3 한 알을 삼켜야겠다.
"생각보다 문제가 쉬웠어."
"정말?"
기대치 못한 희소식에 되묻는 소리가 높은음자리 솔까지 올라갔다.
"10문제 중에서 4문제나 풀었다니까."
시험지를 못 봐서 난이도를 모른다. 풀지 못한 나머지 여섯 문제가 궁금해진다.
"음, 그렇구나."
목소리 톤이 제자리음을 찾았다.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