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은 딸의 질문,
아직도 내가 애기야?

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59화

by 뵤뵤


엄마표 브런치 밥상은 한식보다 양식을 선호하는 딸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아기 주먹만 한 딸기 먼저 한입 베어 물었다. 이렇게 크고 달콤한 딸기는 제주에서 비싸고 귀해서 먹어본 일이 드물었다. 삶은 달걀과 샐러드, 저당 통밀 식빵, 구례에 사는 이모가 보내준 밤잼, 블루베리와 견과류를 얹은 무가당 요거트, 마지막으로 아메리카노까지. 눈요기만 해도 배부른 참인데 엄마는 자꾸 냉장고에서 건강에 좋다는 즙과 영양제를 하나둘씩 꺼내 놓았다. 꼭꼭 씹어 잘 먹는 일만 남았지만, 요거트를 첫술 뜨다 말고 눈물이 나와버렸다. 다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간밤에 자정이 넘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했다. 아침 첫 비행기로 부산에 와서 종일 나다니느라 피곤한 딸이 코를 골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사뭇 가만히 딸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단다.


"안 주무시고 왜 그랬대?"

"앞으로 내 새끼 자는 모습 볼 기회가 몇 번 남았겠나 싶어서."

"...."


눈가와 콧등이 딸기색으로 물들었다. 마주 보던 우리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예전에 시아버지가 해서 애달팠던 말을 엄마 입으로 다시 들으니, 곱절은 더 슬펐다.

9년전인가, 양가 부모님이 찻상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때였다. '우리가 앞으로 아이들을 팔십 번이나 볼 수 있다면 다행일까요'라고 묻던 아버님은 그 횟수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암으로 돌아가셨다. 자식들 볼 날을 손꼽아 세어본 사돈의 말을 유별스럽게 들었던 엄마는 이제야 비로소 와닿는다고 했다. 그래선지 오래 쳐다보고 쓰다듬고 싶었는데 고단해 보이는 자식의 단잠을 깨울세라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어느새 흰머리가 새싹처럼 돋아나고 이마와 미간이 주름진 딸이 툭툭 걷어찬 이불을 살금살금 덮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근데 니 이불 차고 자더라. 그새 몸에 열이 많아졌나? 원래는 추위를 많이 탔는데."

엄마, 나 결혼하고 체질이 바뀌었어. 한겨울에도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거실을 활보하는 남자랑 붙어살아선가. 열이 옮았나 봐.


"니 코도 골더라."

응,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야. 엄마 코를 닮았는데 모전여전이지 머. 콧대뿐 아니라 비염까지 쏙 빼닮은 우리 모녀는 눈물이 나면 콧물도 줄줄 흐른다. 아침부터 눈물, 콧물 바람이라니 반칙이다. 엄마, 정말 이러기야?


"미안해. 모임 가는데 화장 지워지게 해서."

"뭘 미안하기까지 해. 다시 하면 돼. 괜찮아."


밥상머리에서 팽하니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았다. 엄마는 충분히 손 닿을 데 있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내 쪽으로 끌어다 놓았다. 어서 먹으라는 신호였다. 식빵 위에 밤잼을 담뿍 얹었다. ‘와앙’ 하고 입에 넣어 우물우물 씹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사십 년 넘게 매일 붙어살아선지 난 내가 징글징글해 죽겠어. 근데 아직도 엄마 눈엔 내가 애기야?"

"아무렴, 당연하지. 네가 팔십이 넘어도 내 애기지."

아흑, 또 목이 멘다. 겨우 수습하고 한 입 넣었는데. 먹는 속도가 이리 더뎌서야 약속한 모임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매일 마주하는 자신이 징글징글하단 얘기는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10대에는 공부, 20대에는 다이어트와 취업, 30대 이후론 운동과 자기 계발. 생애주기별로 세운 목표를 엄마 친구 아들, 아빠 친구 딸만큼 달성하지 못할 때마다 내가 초라했다. 박약한 의지를 탓하고 탓하다 지칠 때는 스스로가 미울 정도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책의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이에게 가르치는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모순이 문제였다.


아이에겐 손톱 물어뜯지 말라면서 초조해지면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바른 자세로 앉으라면서 걸핏하면 다리를 꼬거나 굼벵이처럼 허리가 굽었다. 운전할 땐 또 어떻고. 바르고 고운 말을 쓰라면서 도로 위에선 I와 C가 툭툭 쏟아졌다. 두 자리 숫자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최소한의 양심이랄까. 아이에게 지적하는 말 대부분은 스스로를 향한 일침과 다름없었다. 언행 불일치와 내로남불과는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주 화가 났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면서 정작 죽고 싶진 않았던 이유를 헤아려본 적 있다. 20대 청춘을 구직에만 허비하느라 별수 없이 나의 무가치함을 인정해야 했던 때였다. 일하고 싶던 기업에 지원했다가 몇 차례 떨어지고 나자 '세상은 온통 괴롭고 귀찮은 것 투성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돌이켜보면 그때조차도 생을 마감하고픈 욕구는 별로 들지 않았다. 삶의 의지가 바닥을 보일 때마다 다디단 생명수 같은 이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동생, 남편과 아이 그리고 학창 시절 친구들이 잊을 만하면 번갈아 가면서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나를 구성하는 전부가 단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자기애가 바닥을 칠 때마다 숨겨진 장점을 기어이 찾아내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사람들.


"너 키울 때 하나도 힘 안 들었어. 너무 순하고 착해서."

"언니는 나한테 고마운 인생의 멘토야."

"자꾸 자기 비하하지 마.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나랑 우리 아이는 뭐가 돼."

"힘들 땐 네 해맑음이 생각나. 널 만나면 기분이 좋아져."


이들은 분명 기억이 고장 난 게 틀림없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나쁜 기억은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 남겨서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철없던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준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서 마음의 빚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 사람들은 가끔 아무 일도 없던 거처럼 군다. 불현듯 지난날의 실수가 떠올라서 괴로운 나는 뭐가 되느냐 말이다. 이래서 죄짓지 말라는 건가. 인복이 많은 걸 인정하고 평생 감사함을 탑재하고 살라는 계시인가 보다.






엄마와 더 오랜 시간을 대화하고 싶었지만 가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모임 장소로 출발을 서둘러야 했다. 양손 가득 짐을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아침 식탁에서 평소와 다르게 애틋했던 분위기가 떠올랐다. 대수로이 넘길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 전혀 불편한 데 없다. 걱정하지 마라."


노파심이라면 다행이었다.

평상시라면 지하철 개찰구에서 헤어질 텐데 굳이 가는 길을 끝까지 배웅하겠다고 해서 함께 표를 끊고 들어왔다. 말을 길게 이어볼 새 없이 지하철이 도착하고 스크린 도어가 열렸다. 다급하게 나보다 좁아지고 낮아진 어깨를 끌어안았다. 열차에 올라타서는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고 컴컴한 시멘트벽이 유리창을 가로막을 때까지 엄마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리서 살고 바쁘단 이유로 자주 보지 못하는 현실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여겼다. 어쩌면 나만 당연한지도 몰랐다. 풍족한 아침을 먹고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마음 또한 불러왔다. 허기진 줄도 몰랐던 자존감이 든든하게 채워지다 못해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다.






모임이 끝난 후, 오후 4시 20분 제주행 비행기를 타러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같은 비행기를 예약한 동료 덕분에 그의 가족이 모는 차에 운 좋게 올라탈 수 있었다. 데려다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찰나, 뒷머리가 쭈뼛 솟았다. 탑승 수속에 필요한 신분증을 미리 꺼내려고 하는데 어딘가 허전했다. 어깨에 둘러메고 있어야 할 핸드백이 보이지 않았다.


미팅 장소에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챙겨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손에 든 짐이 많아도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몰랐다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탑승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동료에게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먼저 들어가 있으라 말해놓고 항공사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무인민원발급기에서 운전경력증명서를 뽑아서 제출하면 된단다.


하지만 지문이 말썽이었다. 주민증에 등록된 지문과 지금의 지문은 날카롭게 베였던 흉터 때문에 모양이 달랐다. 지문 인식에 번번이 실패한 원인이었다. 하긴 같은 이유로 바이오인증을 등록하지 못했다. 그동안 신분을 증명하려고 주민등록증을 꺼낼 때마다 만약을 위해 모바일 신분증을 발급해 두라던 남편의 말이 기억났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뤘고, 일찌감치 조언을 듣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를수록 비행기를 놓칠까 봐 진땀이 났다. 탑승까지 겨우 5분 남았다. 무인민원발급기와의 씨름은 그쯤에서 멈춰야 했다. 기계 대신 사람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국인 출국장을 지키는 보안 요원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미리 발권해 둔 모바일 탑승권이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항공사 데스크와 무인민원발급기 사이를 울상으로 뛰어다니던 내 상황을 다 지켜보았는지 그들은 넓디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출국장과 보안 검색까지 통과하고 기진맥진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먼저와 기다리던 동료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때마침 비행기가 20분가량 연착됐다는 소식으로 안도감을 선사하고 탑승 게이트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다리가 풀려서 대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멋 내느라 곱게 차려입은 블라우스의 등판과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 대체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기 짝이 없다.'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 날 결근을 하게 될지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을 지나오는 내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콱 마! 가스나야, 정신 단디 안 챙기나."


이 모든 상황을 엄마가 보고 있었더라면 등짝 스매싱 감일 텐데. 맞지 않았는데도 등에서 엄마의 손맛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정신이 빠졌다며 호통치는 목소리도 환청으로 들렸다. 혼나 본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했다.

불혹이 넘어서도 칠칠치 못하게 가방을 흘리고 다니는 딸 얘기를 듣는다면 일흔을 앞둔 엄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흑역사를 창조한 게 창피해서 굳이 그날의 사달을 구구절절 알리진 않겠지만, 새삼 묻고 싶다.



그래서 엄마,
아직도 내가 애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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